술 마시는 양이 줄어들지 않았으나, 횟수는 줄었다. 제안서 작업이 생기는 주(週)는 정신 없이 시간이 흐른다. 오직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스트레스와 불면(不眠)의 밤들. 금요일 저녁 늦게 제출하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서야 겨우 내 흐름 속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 세상이 강제하는 질서를 벗어나, 휴일의 온전한 내 질서 속으로. 그걸 기념하기 위해서 였을까. 와인 한 병을 꺼내고 냉동새우를 꺼내 구이를 하고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원팬으로 만든 저녁, 술에 취해 쇼파에서 잠을 잤다. 요즘 자주 내가 살아가는 이유,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 자주 묻는다. 어쩌면 내가 저 외부 세계를 어쩌지 못한다는 절망스러움을 깨달았을 때부터 물었다. 그리고 실존주의자인 카뮈나 야스퍼스가 줄기차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한데, 실은 그 까닭없음은 아직도 낯설다. 부끄럽다. 살아있음이. 슬프다.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아직도 의미를 묻고 있다는 것이.
의외로 평점이 좋은 와인이다. 하지만 초심자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달지 않다. 산뜻한 신맛(탄닌)이 입 안을 한 번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묵직하지 않다. 바르베라(Barbera) 품종은 처음이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주의 주 품종이다. 적당한 바디감(미디엄)으로 산뜻한 풍미와 과실향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좋은 와인이 선사하는 균형감도 이 와인의 장점이다.
애초에 이 피에몬테 지역은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드는 바롤로 와인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0년 이상 장기간 숙성해야만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낸다고 한다(마셔본 지 언제적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르베라 품종은 그렇지 않아, 적당한 가격대의 좋은 피에몬테 와인을 맛보고 싶다면 이 와인이 제격이다. 2021년 산은 와인스펙테이터에서 91점을 받았고, 2022년 산은 디켄터에서 90점을 받았다.
적절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와인이지만, 나에겐 가벼웠고 신맛이 두드러졌다. 보다 묵직하고(풀바디) 보다 견고한 탄닌감, 첫 맛은 건조하고 거친 대지의 느낌이 나고 시간이 흐를 수록 부드러워지면서 풍성한 과실향이 올라오는 와인이 좋다.
최근 마신 와인 중에는 샤또 드 파랑쉐 와인이 좋았다. 최근에 마신 아르헨티나 말벡 와인도 있었는데, 두 번째 마실 땐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