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송병선(옮김), 민음사
Scipta manet, verba volant 입에서 나온 말에는 날개가 있지만, 글로 쓰인 말은 그대로 있다. - 12쪽
꾸준히 보르헤스를 읽는다. 보르헤스를 만나는 동안, 무척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 주제에서 저 단어로 옮겨다니다. 영국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독일 철학자를 꺼내고 다시 고전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동시대 아르헨티나 작가를 꺼내기도 한다. 이런 여행은 보르헤스만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
영국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적은 말수', 즉 사물에 대해 조금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익스피어는 과장이라는 은유법을 즐겨 사용하던 작가입니다. (20쪽)
전혀 영국스럽지 않은 셰익스피어를 이야기하며 영국적인 작가라고 한다면 사무엘 존슨이라고 말하는 보르헤스. 하긴 과묵한 영국인들과 달리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수다장이에 가깝다.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는 건 여러 단어와 표현으로 나누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참고 문헌을 조금만 찾고 비평도 읽지 말고, 직접 책을 읽으라고, 그러면 아마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항상 쾌감을 느끼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억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목소리, 즉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목소리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24쪽)
그의 목소리는 자상하고 배려로 가득차 있다. 어려운 단어도 쉽게 설명하며 그것이 어떻게 문학과 이어지는가 이야기한다. 일종의 문학 개론 수업같다고 할까.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 코린토 신자에게 보내는 두번째 서간, 3장 6절 중에서 (13쪽)
그러면서 문자와 책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다.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쓰인 날부터 우리가 읽는 날까지 흘러간 모든 시간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지속적으로 예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27쪽)
모든 철학 작품 중에서 가장 애절한 책은 플라톤의 <파이돈>입니다. (31쪽)
아주 오래전 누군가와 이야기하다가 문득 플라톤은 낭만주의자라고 이야기한 적 있었다. 고전주의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철학자이지만, 실은 현실 대신 이상을 상정하는 순간, 현실은 비극적으로 변하고 극복해야 되는 어떤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현실적 슬픔을 가득 품은 낭만주의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철학사적 해석이 아닌 문학사적, 예술사적 해석이다. 보르헤스의 저 언급도 문학작품으로 플라톤의 책을 읽었을 때의 해석이 될 것이다. 나는 저 해석이 좋다.
스베덴보리는 보다 풍요로운 삶을 통해 구원받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합니다. 또한 정의와 미덕, 그리고 지성을 통해서도 스스로를 구원하자고 제안합니다. 이후 블레이크가 옵니다. 그는 인간 역시 예술가가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삼중의 구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선행과 정의, 그리고 추상적 지성으로 구원받아야 하고, 이후 예술을 실천하면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64쪽)
예전엔 스베덴보리의 책이 거의 소개되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었다. 한 권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르헤르의 책들을 읽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학자다. 스베덴보리.
보르헤스의 산문들은 다 좋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틈나는대로 구해 읽을 생각이다. 추천한다.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메모한 문장들이다. 탐정 소설 독자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정말 그렇다. 정말 특별한 독자 유형이다.
현재에는 아주 특별한 독자 유형이 존재합니다. 바로 탐정 소설 독자입니다. 세계 모든 국가에 있으며 수백만명에 이르는 이런 독자군은 에드거 앨런 포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68쪽)
첫번째 강연으로 <신곡>을 선택한 것은, 내가 문학도이고 문학의 정점, 즉 모든 문학의 절정은 <신곡>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128쪽)
단테를 다시 꼼꼼히 읽어야겠다.
영원이란 우리 모두의 과거이며, 모든 의식적인 존재의 과거입니다. 모든 과거, 그러니까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모든 과거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재이기도 합니다. 모든 도시와 모든 세상, 행성 간의 공간을 포함하는 모든 현재입니다. 그리고 미래이기도 합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미래도 포함됩니다. (89쪽)
쇼펜하우어 '의지', 우리 각자 안에는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의지가 잇으며, 그 의지는 세계라는 표상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런 개념을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다른 이름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라고 했고, 버나드 쇼는 '생명력(life force)'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든 동일한 개념입니다. (205쪽)
가장 중요한 환멸이 바로 '자아'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흄과 쇼펜하우어, 그리고 우리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주체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일련의 정신상태뿐입니다. 만일 내가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면, 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고정 주체와 그 주체의 작품인 생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흄이 지적하듯이,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비 오다'처럼 무인칭 주어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가 온다고 말할 때, 비가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덥다', '춥다', '비오다'처럼, 무인칭 주어로 '생각한다', '고통받는다'라고 말하면서 주어의 사용을 피해야 합니다. (206쪽)
달이란 시간의 거울이라는 페르시아의 메타포입니다. '시간의 거울'이란 말 속에는 달의 허약성과 영원성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달의 모순입니다. 즉 반투명하면서도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같지만 그 크기는 영원합니다. '달'이라는 말하든, '시간의 거울'이라고 말하든, 그것은 두 개의 미학적 사건입니다. '시간의 거울'이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좀 더 간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달'은 좀 더 효과적인 말이며 달의 개념을 거의 즉각적으로 보여줍니다. 각 단어는 시적인 가품입니다.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