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두 얼굴의 ‘숲’

지하련 2007. 7. 23. 17:04

두 얼굴의 '숲'



문명화된 숲


어렸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을 뒷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내 호기심을 자극하던 뒷산 너머에 있을 그 무언가, 미지의 세계. 거대한 바다가 있거나 반짝이는 조명으로 찬란한 대도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세계 최초로 발견하게 되는 외계인 마을이거나. 그리고 결국 나는 뒷산에 오르고 만다. 오전 일찍 집을 나선 나는 마을 뒤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키에 적당한 길이로 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사용하면서. 그렇게 몇 시간을 올라갔을까. 산 정상은 보이지 않고 좁은 길 흔적마저도 사라진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 속으로 가느다랗게 내려앉은 햇빛뿐. 이 때쯤 되면 나를 지배하던 호기심은 어디론가 뒷걸음쳐 그 모습을 숨기고, 숲 속은 별안간 두렵고 무서운 어떤 것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올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뒤로 돌아 마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지만, 어느 방향에서 올라온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고 등 뒤 공포의 크기는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 커져만 간다. 산 정상으로부터 물들어가는 어둠이 산 아래까지 스며들었을 무렵, 겨우겨우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하게 되고 눈앞에 보이는 마을 불빛을 보며 안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안전한 문명의 불빛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자연과 안전하고 아늑한 문명의 대비를 최초로 경험한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산행을 하더라도 등산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이 사소한 경험은, 실은 오래된 ‘안전한 문명과 야만적 자연의 대비'다. 가령 중세 유럽의 ‘숲’은 ‘가상적 혹은 현실적인 위협과 위험으로 가득했다.' 밤에 늑대로 변신하는 도깨비들이 출현하였고, 야수와 반야만인이 살고 있었다. 그 곳은 ‘장원과 장원, 지방과 지방 사이의 변경 지대였으며, 특히 전혀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가공할 만한 어둠으로부터 굶주린 늑대들이며 산적들이며 약탈적인 기사들이 갑자기 출현하였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서양 중세에 있어서 모든 진보는 가시덤불과 소관목, 또는 만일 불가피하거나 기술과 장비가 허용된다면, 거목과 처녀림, 페르스발의 ‘황량한 숲’, 단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침침한 숲’에 대한 개간과 투쟁과 승리의 결과이다'. (자크 르 고프, <<서양중세문명>>,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년, pp. 155~158 참조)

자크 르 고프가 언급하는 바의 그 ‘진보’는 12세기 고딕(Gothic)을 꽃피우게 하였으며, 근대의 정신(Modernity)이 되었다. 이제 숲, 혹은 자연은 인간이 개척해야 되는, 개척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는 자연과학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야만적 자연은 그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저 밝게 빛나는 이성의 빛 앞에서 자연은 아무런 힘 없는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네덜란드 바로크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문명화된 자연이다. 인간의 힘 앞에서 그 본래의 원초성, 야만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문명 앞에서 나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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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더르트 호버마
<데펜터의 풍경>
목판에 유채, 53.3*71.7cm, 1662년~1663년경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숭고한 어떤 세계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의 빛으로 포섭될 수 있을까. 한 때 그런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시대가 있었으니, 그 시대가 바로 바로크 시대였다. 뉴튼과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바흐와 렘브란트로 이어진 그 시대에 인간은 신의 진리를 알아챌 수 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유일한 존재의 역사는 신의 진리를 알아도 시간 속에 놓여진 운명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를 살다간 칸트는 ‘우리는 결코 물 자체(Ding an sich)가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없고, 사물이 우리들에게 현상하는 대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금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높이 솟아 방금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험한 절벽, 번개와 우뢰를 품고 유유히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자랑하는 화산, 황폐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러한 것들이 가지는 위력과 비교해서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될 뿐이다.
- 칸트, <<판단력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1996년 중판, p.128


칸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연은 숭고한 것이다. 그에게 숭고미는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한 자연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킨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숭고한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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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캔버스에 유화, 110.4*171cm, 1809년경
베를린 국립 미술관.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지친 우리 영혼을 쉬게 해주는 안식처를 넘어 기독교의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신적인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된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가장 막강한 대안이요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범유럽적 경향이었으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자연에 대한 숭배가 종교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자, 숭고한 자연의 모습은 몇몇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소박하고 친근하며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라파엘 전파와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후대 미술사가들의 극단적인 평가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숲 속 개울물 위를 떠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당혹스런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의 주검 주위로 버드나무와 데이지꽃, 장미와 제비꽃 등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켰을 꽃의 상징들로 장식되어있다. 이제 숲 속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흘러가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 인상주의자들에게 숲은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며 지나치게 쓸쓸한 어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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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캔버스에 유화, 76.2*111.8cm, 1851년경
런던 테이트갤러리.



(*월간 <숲> 8월호에 실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