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하련 2025. 6. 15. 12:25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지음), 이상길(옮김), 문학과지성사 

 

 

 

1. 

한국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의아했다. 읽고 난 다음 이해할 수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프랑스 지방 도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동성애자 지식인이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고백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트렌디한 지식인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나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알라딘 서점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으로 추천되었고,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2021년도에도 여러 일간지에서 동시에 추천도서로 올라왔다는 점에서, 과연 이 책이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한국의 독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고민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성정체성을 고민해서 이성애자가, 아, 나는 게이였어 라든가 아, 나는 양성애자였어라고 고백하게 될까. 아니면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어떤 이가 우연히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각성하고 난 다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다거나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거나, 철지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도 되어야 할까? 도대체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기에, 최고의 책이 되고 추천도서가 되는 걸까? (이 책보다 지금 여기 한국의 독자들에게 권해야 하는 정말 중요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2. 

최근에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이들은 나와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지적 역량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나, 그럴 기회가 애초에 없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선 매우 영악하고 돈에 민감하다(이건 내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역량이다).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대부분 그렇듯이 적절하게 선하고 적절하게 악하다. 그리고 난 다음, 단순한 질문이 떠올랐다. 유튜브를 보면 중도나 진보 쪽에 있는 이들이 나와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저 이야기를 듣고 일반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실은 사용하는 단어부터 제법 좋은 대학을 나와 책 좀 읽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고 문장이었다. 나에겐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지만, 누군가들에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미국 민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것은 너무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한국의 진보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아젠다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이와 비슷하게 이 책도 그런 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지향하는 노동자 운동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노총은 이미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노조들, 즉 규모가 있고 급여도 센 기업들의 강성 노조들이 차지한 정치 결사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중소기업이나 소기업들의 노동자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 심지어 기업체에서 짤려, 어쩔 수 없이 가게 사장님이 된 이들 조차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한국의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한 표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은 이들 앞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지). 더 나아가 대기업 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이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급여 향상을 위해 자신들의 급여 인상 폭을 조정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길 희망한다. 그래야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 노동자 세상이 온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추천도서가 된 이유는 성정체성과 계급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 성정체성과 계급 정체성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건가. 도대체 이 책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왜 당신들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인가? 

 

3. 

내가 이 책을 추천한다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주 우연히 고등학교까지 진학했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한 소년이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파리로 나와, 세계로 나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했으니, 당신도 그럴 수 있다고 희망을 안겨주어서 라고 할까. 아니면 프랑스나 한국이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으며, 한 때 우리가 선망했던 프랑스 지식인들도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굳이 유럽의 지식인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추천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보자면, 추천할 만한 책들이 널려있을 텐데 말이다.  

 

초반부터 좀 삐딱하게 썼는데, 나는 추천할 만한 무수한 책들을 두고 이 책을 추천한 이들에겐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겉멋이나 허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이런 겉멋이나 허위를 가지고 있었으니,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4.  

내가 보기에는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은 있는 그 자체로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특권층 인사가 내놓은 순진한 고백인 것이다. 나는 이 인물을 평생 딱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즉각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아롱을 보며서, 그의 번지르르한 웃음, 들척지근한 목소리, 신중하고 합리적인 성격인 양 과시하는 방식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상 품위와 이데올로기적 중용이라는 그의 부르주아적 에토스를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112쪽 ~ 113쪽) 

 

레이몽 아롱에 대한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은 상당히 직설적이고 흥미로웠다. 하긴 레이몽 아롱에 대한 프랑스 내 좌파들의 비판은 유명했으니. 다만 에리봉의 저 비판도 그런 맥락을 같이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젠 레이몽 아롱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으니, 읽는 이들도 없겠지만. 

 


그런데 여기서 나는, 민중 계급이 겪는 교육 체계로부터의 체계적 배제라든지, 그러한 매커니즘의 힘에 의해 민중 계급에 운명지어진 사회적 열등성과 분리의 상황과 같은 통계적 현실도 다르게 해석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제도 속에 감춰진 기능이나 악의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사회적 음모론에 물들어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정확히 부르디외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개념을 질책하며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개념이 “최악의 것을 향한 기능주의”라는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기구가 “어떤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사악한 기계”가 된다고 쓰고는, “이러한 공모에 대한 환상, 사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 악막적 의지가 책임이 있다는 관념이 비판적 사유를 사로잡고 있다”고 덧붙인다.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개념이 우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극작술 - 혹은 오래된 말잔치 - 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37쪽 - 138쪽)

 

부르디외의 비판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알튀세르의 저 이론은 생각할수록 너무 기계적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제대로 분석하여 이야기한 걸 읽지 못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윤소영 한신대 교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파시즘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자와 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운동권이든 좌파 지식인이든 파시스트는 막아야 하니 윤석열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 

 

5.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왔다. 그녀와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과의 화해, 내가 거부하고 내쫓고 부인했던 나 자신의 어떤 부분과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13쪽) 

 

나는 도시를 떠난 전형적인 게이의 여정을 따랐다. 새로운 사회성의 네트워크 안에 자리 잡고 게이들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게이로서 발명하고, 게이로서의 삶을 배워나가는 여정 말이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사회적 여정을 따랐는데, 흔히 '계급탈주자 transfuges de classe'라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여정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탈주자'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이들은 거의 반 영구적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자신의 출신 계급에 거리를 두고, 자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관심을 쏟기 마련이다. (27쪽)

 

과거의 단절, 혹은 탈출은 익숙한 테마이긴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의 회고로 접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제 3세계에 속했던 한국에서 자란 나로선 다소 의외였다. 그 땐 무조건 선진국, 선진국 했으며, 한국은 이류라고 믿었고 강요당했던 때였으니.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쳤다. 

 

나는 의무 교육 연력이 16세까지로 연장되었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분개했는지 기억한다. "뭣 하러 애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계속하게 만드는 거야? 애들은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이러한 '취향', 아니 공부에 대한 '무취향'이 얼마나 차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지를 전혀 의문시하지 않고, 사람들은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54쪽) 

 

하긴 가난했던 까뮈를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그의 선생은 까뮈의 집으로 가서 까뮈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설득했으니. 어쩌면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이상한 종류에 가까울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문화 자본으로 계급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이러한 프랑스적 상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 초반 디디에 에리봉의 아버지가 '혁명'을 이야기하다가 책 후반부엔 우파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정치 성향과 실제 대중이 고려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 이는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서구 사회, 특히 유럽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날 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기에("이건 전부 의도된 거야"), '혁명'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에 그렇게나 많은 불행을 초래한 사악한 힘 - 우파, '부자놈들', '거물들' - 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 - 하나의 신화에 맞서는 또 다른 신화 - 인 양 소환되었다. (47쪽)

 

퀸 슬로보디언은 <<크랙업 캐피탈리즘>>에서 '구역(zone)이 나누어지는 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경제적 능력이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정말 많은 책에서 이렇게 떠들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을 하고 그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 정치 탓, 언론 탓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아파트 커뮤니티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아파트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발언을 하고 천천히 사람들이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부부와 가족의 구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고 나쁨을 떠나 복잡성, 다양성, 절연, 잇단 선택, 재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동거하는' 남녀, '배다른' 아이들, 이혼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사는 유부남, 유부녀 등등) (77쪽) 

 

경제적 불평등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해결된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어떤 불평등이 있고, 그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역사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체로 격변기이거나 막 격변기를 거쳐온 시기가 될 것이다. 우파들은 경제적 불평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불평등의 원인을 말로 설명하기도,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구조적 문제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이민자, 혹은 난민의 문제로 몰아간다. 이는 한국의 극우들이 '중국인'을 들먹이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뻔한 거짓말에 일부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걸 나로선 도저리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나이든 일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최근 몇 년을 겪어오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아베세데르 L'Abe'ce'daire>에서 질 들뢰즈는 "좌파라는 것"은 "먼저 세계를 내다보는 것", "멀리 내다보는 것"(우리 동네의 문제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제 3세계의 문제를 긴급한 사안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반대로 "좌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46쪽) 

 

하지만 질 들뢰즈처럼 되지는 말자. 저 구분은 너무 형편이 없어서, 눈 앞의 해결 가능한(그러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참여가 필요한) 어떤 이슈에는 무관심해지면서, 반대로 마치 선량하고 정의에 불타는, 지적인 코스모폴리탄이 된 양 행동하는 겉멋 좌파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책에서 얻은 개념이었고 추상적인 관념이었다. 부모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소외된 노동자'와 '계급 의식'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개탄하는데 만족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 '혁명에 입각한' 정치적 판단이 내가 부모님과 가족에 대해 내리는 사회적 판단과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사회적인 탈동일시de'sidentification의 벡터였다.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계급'을 예찬한 것이다. (99쪽) 

 

디디에 에리봉의 고백은 일부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는 자신의 배경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멀어지기 위해 좌파가 된 것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게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translation"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 (204쪽)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졌던 의문인데, 왜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것일까. 실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특히 나에게 있어서 이 둘은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매우 싫어하는 구석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한국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재직자들과 자영업자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거나 관련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우파에서는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과거부터 있었던 불평등이나 지배/피지배의 구조가 바뀐 건 아니다. 그저 변화된 것일 뿐. 하긴 이 변화만으로도 사회는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 개선만큼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더 해결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매 페이지에서 나 역시 경험했던 것들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어떤 감정에 전율한다. 푸코가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안다. 그는 몇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고, 오랫동안 이성과 광기를 가르는 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 천천히 나아갔다(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푸코는 '불행'에게서 자신의 형제를 알아보았다고). 푸코는 자발적 유배를 통해(처음은 스웨덴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의학적 병리화라는 유사과학적 담론을 급진적으로 문제화하는 끈기 있는 노동을 통해 간신히 궁지에서 벗어났다. (252쪽)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지만, 읽긴 쉽지 않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불합리한 면들을 이야기하며 고백하지만, 그 고백적 서사가 한국 사회에 어떤 것들을 시사하는 것일까. 지적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그 뿐이다.  나는 이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 권하는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실천적 행동을 요구하는 기후 위기에 대한 책이나 정치적 편견들이 가져다 주는 위험성이나 경제적 불평등으로 야기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책들은 추천되지 않고 프랑스 게이 지식인의 고백담이 추천되는 걸 보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지적 허영이 아직도 상당히 심각하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하긴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무수한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를 팔아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던 나 또한 그 부류로 인식되는 걸 보면서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가 반문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것이다. 디디에 에리봉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나는 가난한 지역에서 못 배운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이예요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 고백이 얼마나 어려웠던 것일까. 다행히 아직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지만, 아마 어쩌면서 수십년이 지난 후엔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지식인이 나올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시작되었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너무 심해지고 있으니... 

 

노동자의 자식은 자신이 노동 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11쪽) 

 

* 서평이라고 적긴 했지만, 너무 두서 없이 적었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직업적 서평가도 아니고 이젠 그냥 책읽기 좋아하고 가끔 글을 쓰는 아저씨에 불과하니까. 

 

* 출처: https://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2111221342521&code=#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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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에리봉(195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