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천 개의 베개, 노동효

지하련 2025. 6. 2. 14:51

 

 

천 개의 베개

노동효 (지음), 나무발전소 

 

 

EBS 세계테마기행을 보다가 저자 노동효를 본 적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열여섯살 무렵 잤다는 마산의 철교 밑 방범초소가 어딘지 궁금해진다.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몇 개 되지 않는 철교 밑에 방범초소가 있을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족의 일로 마산을 오갈 뿐, 오래 머물러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혼자 잘 놀지만, 다른 곳에 가서, 그 어느 곳의 소속이 아닌 채 혼자 지낸다는 건 상상해보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곳들을 떠돌아다닌다는 건. 그것을 사람들은 여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행을 꿈꿀 뿐, 여행을 떠날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요즘 나로 하여금 여행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채널이 있는데, '슬기로운 캠핑생활'(https://www.youtube.com/@korea_travel/featured)이다. 채널 운영 초반에는 캠핑이었으나, 최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한 당일치기 여행을 올리고 있다. 즉, 잠은 집에서 잘 수 있다는!

 

이 책은 여행기다. 그것도 삶과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찬 여행기다. 쓸쓸하지 않고 외롭지 않으며, 어디에 가더라도 친구가 있고 환대와 배려를 받으며 예상치 못한 고생을 하지만 도와주는 이는 반드시 나타난다. 심지어 UFO를 보고 영성을 믿게 되었다는 이고르라는 청년까지 등장하며,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의 우정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될 땐, 뭐랄까, 도시 속의 우리들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스티브 잡스도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직원들을 매몰아치는 CEO가 되었지. 알 수 없어.) 

 

볼리비아 코로이코 (아, 볼리비아 가고 싶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마이파타를 떠나던 무렵을 기억한다. 주말 성당 미사에 참석했는데 미사 도중 후아니토 신부가 갑작스레 나를 제단 앞으로 불러냈다. 그가 말했다. "한국인 로는 남아메리카에 여행 온 후 거듭 사마이파타를 방문하면서 우리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로가 또 다시 먼 길을 떠납니다. 그의 여행길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고국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95쪽) 

 

볼리비아 사마이파타(Samaipata).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이 곳은 가고 싶다'고 조용히 읖조렸다. 잉카 원주민 말로 '언덕에서 쉬다'라는 뜻의 이 마을에 온 여행객들 중 일부는 그냥 눌러앉는다고 한다. 나는 21세기가 되면, 기원전BC(Before Christ)와 기원후AD(Anno Domini)로 나누어지 서기 1세기 경의 코스모폴리탄들의 시대가 될 것이라 여겼는데, 과연 그렇게 될 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다시 한 번 여행을 꿈꾸기로 한다. 여행에 대한 내 로망은 1)산티아고 순례기를 다녀오는 것, 2)시인 움베르토 사와 소설가 이탈로 스베보의 고향이자, 제임스 조이스가 10년 이상 살며 <<율리시즈>>를 집필했으며, 릴케도 이 도시 근처에서 <<두이노의 비가>>를 썼다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한 달 살기 정도 있는데, 가능할 진 잘 모르겠다. 

 

마치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듯 책은 금방 읽히지만, 이 책의 여운은 상당할 것같다. 노동효 작가는 지금 어디에 있더라. 아, 25년 6월 초 기준으로 알바니아에 있구나. 스리랑카에서 알바니아로 넘어갔다(그와 나는 페북 친구다.) 그리고 이 책에서 새삼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1년엔 두 세번 만나는 부부라니. 

 

나도 따라 웃었다. 아내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문득 한국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한국인 아내와 강원도 고성의 어촌에서 살던 그를 만났을 때, 이국에서의 삶이 어떠냐고 물었더랬다. 그가 내게 눈을 찡긋하더니 말했다. 

"아내가 있는 곳이라면, 지구 어느 곳에 있든지 천국이지!" 

과연! 입담 좋은 이탈리아 남자다운 대답이었다. 그의 아내와 나의 아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그가 덧붙였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좋은 배우자라야 해. 나쁜 배우자라면 지구 어느 곳에 있든, 지옥이 될 수도 있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83쪽)

 

아래는 노동효 작가가 등장하는 세계테마기행 나미비야 편이다. 대박난 영상이다. 참고로 가끔 EBS 세계테마기행을 보다보면, 그를 만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HOSm1WceM 

 

 

 

* Anno Domini는 '주님의 해에', '그리스도의 해에'라는 뜻의 라틴어다. 기원후 6세기 중반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Before Christ는 8세기 초 영국의 수도사 베다(Bede)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AD와 구분짓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특히 베다에 의해 AD로 년도를 구분하는 관행이 널리 정착되었다. 

 

*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을 보면, '볼리비아' 이야기가 나온다. 이 때만 하더라도 지정학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았을 때이기는 하지만, 내륙 국가의 지정학적 한계를 언급하면서 볼리비아가 사례로 등장한다. 그는 볼리비아의 초인플레이션 해결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경제성장에 있어서 지리적 여건이나 환경적 요인을 깨우치는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어보나, 노동효의 이 책을 읽어보나, 경제적 수준과 일상의 행복과는 무관한 듯 보인다. 도리어 한병철이 비난하는 현대 선진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피로사회>>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