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4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어떤 기적의 풍경

사무실 옆 아파트 화단에 분홍 빛깔 꽃들이 봄바람에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내 마음도 흔들, 흔들, 흔들거렸다. 흔들, 흔들, 흔들거리며 집에 들어와 잠을 잤을 게다. 어쩌면 집에 들어와 울었을 지도 모르고 한바탕 난리를 피웠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 어떻게 술을 마셨는지 기억에 없으니 말이다. 그 날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소주를 마셨고 태어나서 그렇게 쉽게 소주가 들어가는 날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소주 몇 병을 마시고 자리를 옮겨 위스키 두 병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사무실에 나가지 못했다. 내가 술에 취해 잠을 자는 동안, 세상은 몇 번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과거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인정하려고도, 인정할 생각..

초겨울이었다

초겨울이었다. 95년 창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 양말 하나를 놔두고 나왔다. 침대에서 뒹굴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다. 술을 너무 마시고 나타난 그녀를 안고 그녀의 집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술에 취해 침대에서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생각했던 그녀가 덥석 날 껴안았을 때, 내일 오전까지 그녀와 있어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대 옆 큰 창으로 새벽빛이 들어왔다. 새벽빛들이 그녀와 내 몸을 감싸고 지나쳤다.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새벽 취객의 소리도 들렸다. 내 몸 위에서 그녀는 가슴을 두 손으로 모으면서 내 가슴 이쁘지 않아. 다들 이쁘대. 하지만 그녀와의 정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금방 지쳐 잠을 자기 시작했고 그녀 옆에서 아침까지 누웠다 앉았다 담배를 피워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