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4

봄날의 쓸쓸함

도심의 봄은 쓸쓸하고 고요하다. 부산스러운 자동차 소리가 바닥을 스칠 때, 떨어진 분홍 꽃이파리들이 살짝 살짝 좌우로 물결치며 외로운 연인들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근대적 고독과 동시대적 고립은 하나의 쌍이 되어, 이젠 연인들마저 쓸쓸하게 만들었다. 이제 다들 챗지피티에게 사랑을 묻고 사랑에 답하며 실연의 슬픔을 위로 받는다. 어쩌면 앞으로 이어질 끔찍한 봄날의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봄날의 쓸쓸함이 가을날의 외로움으로 이어지겠지. 그렇게 봄 꽃잎이 지고 가을 낙엽마저 쌓여 흙으로 사라질 때, 그 때 그 사람을 그리워하겠지. 늘 후회는 예상보다 빨리 와선, 나를, 우리를 고통스러운 겨울밤의 고뇌 속으로 더 깊이 밀어넣겠지. 아마도, 언제나 그랬듯이.

문득, 그리움

가을이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바빴고 여유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심했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한강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누구에게도 추천을 받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의 르 끌레지오를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밀란 쿤데라가 받을 것이라 여겼다. 모디아노가 받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키는 받지 못할 것이며, 오에 겐자부로의 목소리는 일본 속의 소수자들을 대변할 뿐이었다.   창원에 내려와 도서관에 잠시 들렸다. 도서관 창으로 숲이 보이고 가을이 보였다. 고향 집으로 가면서 노란 은행잎을 책 속에 넣었다. 추억이 떠올라 슬펐다.

어느 화요일 밤, 혹은 수요일 새벽

어제 11시에 퇴근하곤 오늘 8시에 프로젝트 사무실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 혼자 저녁을 먹고 서점에서 두 권의 수필집을 산다.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굳어졌고 프로젝트 걱정, 미래에 대한 염려, 세상에 대한 불안, 가족에 대한 책임,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젠 잠마저 쉬이 들지 못하는 중년의 초가을. 장석주의 , 헬렌 맥도널드의 을 충동적으로 사선 내 마음이 물렁해지고 내 몸이 사랑으로 물들고 세상으로부터 온전한 내 전부가 자유로워지길 꿈꾼다.

로르까와 함께 5월 어느 오후

조심스럽게, 상냥한 오월의 바람이 녹색 이파리 끝에 닿자, 이미 무성해진 아카시아 잎들이 놀라며, 스치는 바람에게 지금 칠월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반팔 차림의 행인은 영 어색하고 고민스러운 땀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며, 건조한 거리를 배회하고, 길가의 주점은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며, 다가올 어지러운 마음의 밤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5월 어느 날, 그 누구도 듣지 않고 말만 했다. 말하는 위안이 지구를 뒤덮었다. 아스팔트 아래 아카시아 나무 뿌리가 바람에 이야기를 건네었지만, 땅 위와 아래는 서로 교통이 금지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을 모더니티로 담론화시켰다. (이제서야 로르카의 시가 읽히다니... 1996년도에 산 시집인데..) 연 가 내 입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