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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속의 단상

어느 겨울이 가고, 어떤 눈들이 쌓인 채 녹고, 순백의 그녀 얼굴은 기억나지 않고, 내 이마 위로 세월의 흔적이 스며드는 2월의 오후, 흐린 하늘 아래 희미한 목소리가 날개짓하며 지난다. 지난 눈 내린 풍경이 떠올라 찾은 사진 한 장. 눈 밭에 뒹군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한 중년. 저 끝없는 우주의 무심함이 나를 쓸쓸하게 위로한다.

눈 내린 도서관에서의 빡침 - 공적 공간의 사적 점유

책들이 고요하게 숨을 쉬는 서가 사이로, 눈 내리는 창 밖 풍경을 보러 집 근처 도서관에 왔지만, 아, 나는 스트레스로 터질 것만 같다. 내 옆에 앉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참고서를 잠시 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고, 그리고 이 행동을 무려 한 시간 이상 반복을 하다가 나갔다. 심지어 커피를 가지고 간 사이 내 책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책가방을 올려놓는 대범함까지 보여주었다. 그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집어던질 뻔했다. 그 화를 참는데 약 삼십분 정도 걸렸다. 앞 좌석에 앉은 한 여성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앉더니,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는 아무..

MISC.

그냥 이래저래 우울하다. 좋은 일도 있지만, 스트레스 받는 일만 가득한 프로젝트 사무실도 있다. 살아갈 수록 세상은 잘 모르겠고 사람들은 무섭다. 악의 없는 사람들의 실수들이 모여 거대한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그 실수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내 한계를 뚜렷하게 알게 되자, 별안간 지쳐버렸다. 한계 돌파의 법칙 같은 건 없다. 한계 돌파란 스스로를 파괴하는 짓이다. 내 스스로 나를 파괴하기엔 이미 너무 지났다. 가을이 가자, 겨울이 왔다. 비가 내린 후 해가 떴고 눈이 내린 후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가을에 여행을 많이 가지 못했다. 이번 겨울엔 여행을 자주 가고 싶으나,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나마 올해 잘 한 건 성당에 꼬박꼬박 나간 것, ..

눈 속의 출근길

뜻밖의 많은 눈 속의 내키지 않은 출근길. 작고 낡은 검정 타이어를 끼운 초록 빛깔 마을버스가, 빠르게 떨어져 쌓이는 눈송이들을 아주 느리고 무겁게 밟으며 힘겹게 경사진 도로를 올라왔다. 누군가가 바쁜 출근길에 왜 이렇게 마을버스는 안 오는거야라고 말했지만, 정류소에 있던 다른 이들의 입술, 목, 눈꼬리, 머리, 다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못했다, 숨을 헉학대며 버스가 왔다. 계속 눈이 내렸다. 출근은 시작되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고 우리들 모두 내일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모두 다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사랑하던, 했던 그녀도, 한때 믿는다고 착각했던 하나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나를 찾는 걸까, 정..

눈,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

북강변

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에너지와 레드불

커피를 두 번이나 내려 마시곤 결국 레드불을 사서 먹는다. 온 몸이 카페인화되고 심장 박동수는 빨라지고 피부가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집중력 향상은 적응되지 않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도리어 산만해지고 말았다. 회사를 옮기고 나는 자주 밤샘을 하고 있다. 주로 고객사에 Web Strategy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Contents를 어떻게 창조하여 보여줄 것인지, User Interface나 User Experience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Technology를 사용할 것인가를 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고객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인데, 그러다보니, 매번 제안서마다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에 대한 가치를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