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6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Edgar Degas A Woman Seated beside a Vase of Flowers Oil on Canvas, 73.7 x 92.7cm, 1865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은 저 사각의 캔버스 안 뿐이다. 저 사각형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것이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Esse est Perce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주의자들은 저 사각형 안에 모든 것들을 담아내려 했다. 캔버스, 혹은 작품의 공간 안에 시작과 끝이 있어야 했다.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 속에 그리스 철학 전체를 담아내려고 했다면, 젊은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할 ..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Le Temps et L'autre 엠마누엘 레비나스(지음), 강영안(옮김), 문예출판사 1996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고 나는 1997년에 구했다. 그 이후로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첫 문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외롭다는 생각, 혹은 그런 경험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무서워했던 걸까.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우리는 이 강의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다. (29쪽)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살펴보며 자아(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탐구를 해나간다. 유행하는 철학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하면서도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결국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서로 함께 있음(Miteinandersein)의 본질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난..

레비나스의 '죽음'

일요일 저녁, 레비나스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하는 실존이라는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로 떨어져서 우리를 엄습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 ...) 현존보다 더 영향을 미치는 파열, 선험성보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엠마누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박규현 옮김/동문선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직장에서의 내 위치가 올라갈수록 개인 시간을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특히 돈벌이와 무관한, 개인적 시간은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임을.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난 다음 짧은 서평을 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쓰게 된다면, 적어도 그 책에 대한 찬사가 되어야 하고, 그 찬사가 그 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책이다. 레비나스는 오래 동안 블랑쇼와의 깊은 우정을 통해 그의 ..

블랑쇼와 레비나스를 지나는 문학, 또는 언어

세상 속에 자리할 수 없는 불가능성들이 존재하는 황야에서의 고독. 문학은 우리를 그러한 황야로 이끈다. 문학은 언제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 레비나스 한참 머뭇거렸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와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를 담아낸 듯한 저 문장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로 하여금 메아리가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 레비나스 그렇다면 한국어 문학 중에 그런 문학이 있었던 걸까? 오늘 잠시 들른 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블랑쇼. 매혹적이..

윤리와 무한,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와의 대화, 양명수 역, 다산글방. 2000 분명 앞으로 펴쳐질 100년 동안 윤리, 또는 윤리학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허무로 휩싸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퍽퍽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생의 허무(vanitas)'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존재의 철학들(이 말이 가능하다면!)은 대학 강단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 속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 철학들의 우두머리격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몇몇 명징한 말들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