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14

아비정전, 혹은 그 해의 슬픔

오전 회의를 끝내고 내 스타일, 즉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다음 판단하려는 이들은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5월의, 낯선 여름 같은 대기 속에 느꼈다, 강남 차병원 사거리에서 교보생명 사거리로 걸어가면서.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했고 읍소를 했다. 상대방이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일은 급하게 처리되어야만 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니, 읍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외주사를 끼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내가. 5시 반, 외주 업체 담당자, '내가 IT 개발자 출신인가'하고 묻는다. 차라리 '작업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여기는 터인데. (* 여기에서 '작업'이란 '예술 창작'을 의미함) 그리고 오늘 '멘탈붕괴'라는..

어느 목요일 밤...

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

중독

요즘 부쩍, 자주, 곧잘, 심심치 않게, 흔하게, 우울해지곤 한다. 집 청소를 하지 못한지, 2주일 째. 냄비에 담긴 음식물은 미동도 없이 2주일 째 그대로 방치되었고, 금붕어들이 노는 어항의 물도 2주일 째, 그대로다. 일요일마다 배달되던 신문은 요금 미납으로 끊겼고 그 누구의 편지도 오지 않는 우편함에는 딱딱한 표정을 가진 고지서들만 쌓여가고 있다. 몇 주 전 사놓은 미국산 피노누아 와인은 어두운 찬장에서, 어떤 기분으로 무너져가고 있을 지. 다시 젊은 마음을 가지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오래된 친구들 얼굴 깊은 곳에서 나이를 느낄 때의, 그 참담함이란. 참 이뻤던 친구가 무표정한 시선으로, 이 세상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할 때면,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까마득한 후배들과 아직도 종종 말이 통하지 ..

혼자 맥주 마시기

아는 분께서 자신은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세상 속을 살아가는 자아이고 하나는 세상 속을 살아가는 자아를 쳐다보면서 조소하는 자아. 나도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빛깔을 잃어버렸고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리고 내가 빠진 이 나락 속에서 날 꺼집어낼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진짜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퇴근 길에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걸까', '왜 살아가는 걸까'만 생각했다. 너무 심각해져서 혼자 KFC에 들어가 징거버거, 치킨 샐러드를 먹었다. 얼마 전 끔찍하게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술을 마시지 않고 밥을 먹었는데, 그 때 술에 대한 욕구는 허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난 왜 살아가는 걸까. 무엇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