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17

책상 위 화분

내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최초는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고 몇 번은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 없는 식물이 침묵과 쓸쓸함 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 한 켠에 화분을 놓아두고 그 옆엔 낡은, 자신의 노년을 겨우 지탱해나가는 캔우드 리시버 앰프를 놓아두었다. 화분은 소란스럽고 건조한 사무실을 잘 견디었고, 오래된 캔우드 리시버 앰프는 몇 명의 주인을 거쳐간 다음, 나에게 왔지만, 가끔 자신의 처지를 슬프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늘은 화분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얇게 내리는 비와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속에 놓아 두었다. 비와 바람은 옛날 이야기를 내 귀에 속삭였지만, 모던 사회에..

다시 봄이 왔다

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

어느 목요일 밤...

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

대학 시절

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봄비, 술, 몇 가지 생각

어제 소리 없는 내리는 봄비 모습이 좋았고 오늘 창 틈으로 밀려든 봄날 스산함이 좋았다. 몇 가지 더 좋은 일이 봄바람을 타고 밀려들었으면 더 좋겠다.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은 빈약해져가고 내 영혼은 가난함으로 물들어있다. 오랜 만에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었고 시디 케이스의 먼지를 닦았다. 밀린 신문을 읽으며 일을 했고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힘든 생활의 연속이지만, 잘 되거라 믿는다. 주중에는 시간을 내어 전시를 볼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생각이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같이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Little Jack Melody의 'The Ballad Of The Ladies' M..

바람의 노래

갑자기 뜨거운 바람의 그 열기를 잃어버렸다. 꼭 사랑에 빠져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을 지나가던 한 소녀가 몇 개의 계절을 보내고 난 다음 화사함은 다 사라지고 투명한 어두움, 생의 어떤 깊이를 가진 미소를 지어보일 때, 문득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듯이, 새벽 택시에서 내려 열기를 잃어버린 바람의 노래를 보면서, 잠시 쓸쓸함을 느꼈다. 찬 바람이 분다.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젊음들이 어디에 가서 부딪히고 어디에 가서 우는가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바람이. 그저 한 쪽 방향에서 한 쪽 방향으로. 때로 빙빙 돌면서 불기도 한다. 도시의 빌딩들이 지하보다는 하늘을 향해 더 높이 올라가듯이, 내 눈물은 하늘을 향하기 보다는 땅바닥을 향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빌딩이 위로 향하는 것과 내 눈..

바람 속의 네 사람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가슴에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 손가락 하나 사랑하는 이 가슴에다 심어주고 온 사람, 그렇게 세 명이서 만났다. 원래 네 명이 만나기로 되어있었는데, 한 명은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고개'에게 손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개'는 웃기 시작했고, '가슴 구멍'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도 웃었다. 웃으면서 '고개'는 계속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고 '가슴 구멍'은 등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에 나 있는 구멍들을 통과해 나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손을 앞가슴 쪽에다 갖다대었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고 '가슴구멍'의 몸에서 바람소리가 멜로디를 만들었다. '고개'는 너무 고개를 많이 돌려 목에서 이상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