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15

다시 봄이 왔다

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

아슬아슬한 봄날은 지나가고

몇 달 전, 과천에서의 하루. 사쿠라를 찍었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일본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이 나질 않는다. 과천에 같이 갔던 이와는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골목길 어느 집 정원 담벼락에 흘러넘쳐 나온 장미꽃의 농염함. 나에게도 이런 농염함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다가가는 짙은 향기와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자극적인 색채까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면, 아예 꿈을 꾸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마치 나에게 사랑처럼. 마을 버스를 타고 나가던 길. 혼자 나오는 길은 늘 일상처럼 펼쳐지지만,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긴 이 세상 전체가 낯선 곳이니. 독일의 미술사학자 보링거의 견해처럼, 나는 추상주의자일 지도 모르겠다.

메이데이의 출근, 그리고 연휴

천천히 집을 나섰다. 지난 밤 숙취가 풀리지 않아서였고, 노동절이라는 핑계로 다소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였다. 지하철 대신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오는 공항버스를 탔다. 역시 연휴의 시작인지라, 88도로는 꽉 막혔고(여의도 구간은 현재 공사 중이라 한 차선을 막아놓아 더 막히고 있다), 강변북로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치 연휴의 시작이 아닌, 그저 평범한 금요일 오전 같았다. 혼자서,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긴 연휴가 불편하기만 하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도 결혼을 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외국으로 나가든지 한 탓에, 누군가를 불러 술 한 잔 마신다는 것도 불편한 일이 되었다. 어디 혼자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있을까 싶다. 오전에 한강 변을 지나는데, 하늘을 나는 브이자로 나는 새떼..

봄날의 문자 메시지

군대를 벗어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느새 민방위이다. 넓은 영등포 구민 회관 입구 쓰레기통에다 민방위 관련 책자를 놔두고 왔다. 강당 앞쪽에 앉아 있는데, 몇 통의 전화가 왔고 몇 개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전화와 문자메시지. 보통 때라면 오지 않았을. 바람은 너울치듯이 나무가지 앉았다가 지붕에 앉았다가 전신주에 앉았다가, 그렇게 봄을 심어놓으면서 지나가고 도시의 퀘퀘한 매연 틈 속에서 햇살은 곧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후 두 시 반.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문제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그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이 멍에가 되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 미안하구요." 낯선 전화번호. 누구일까. 누구였을까. 그리고 민방위 교육 사이 쉬는 시간, 누구신가..

어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 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 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 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 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