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20

베르그송과 플라톤

그러므로 운동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데아에 공허나 부정적인 것을 덧붙여야 한다. 플라톤의 "비존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는 이런 것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마치 산수의 한 단위에 영이 합쳐지듯이 이데아와 합쳐져서 이데아를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수화시키는 형이상학적 공허인 것이다. 불변적이고 단일한 이데아는 이에 의하여 무한히 퍼져가는 운동으로 분산된다. 권리상으로는 오직 불변적인 이데아들만이 있어서 상호간에 움직일 수 없이 꽉 들어차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질료가 나타나서 공백을 거기에 덧붙여주고, 동시에 우주적인 생성을 분리해 낸다. 질료는 파악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면서 이데아들 사이에 잠입하여 마치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든 의심처럼 끝없는 동요와 영원한 불안을 자아낸다. 불변의..

시간, 유한함, 혹은 너의 존재 - Eric Poitevin

대학에 입학했던 게 벌써 16년이 지났다. 대학 때에도 잘 모이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동안 모이지 않다가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해마다 한 번 정도 모이게 되었다. 그것도 동기의 삼분의 일이나 사분의 일 정도만 모일 뿐, 다들 소문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문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에 속한 친구들은 몇 명 없었고 직장생활을 하거나 영화나 TV 쪽에 가있었다. 나의 경우에만 미술 쪽에 있었다. 어제 일 년에 한 번 있는 송년 동기모임이었다. 보통은 시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도 연말만 되면 '세월 참 빠르네'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시간은 참 빨리 흘러가고, 나이를 먹고 슬슬 지쳐가고 자조적인 웃음만을 가지게 된다. 시간에 대한 이런 생각은 언제서 부터 시작..

온 카와라On Kawara, 두아트서울

ON KAWARA JUL.23, 2008 - AUG.24, 2008 doART Seoul 흥미로운 의문이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 있다. 특히 반데카르트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에서 그 문장은 종종 한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온 카와라(On Kawara)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간과 인간 존재에 대해 천착한다는 점에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비교하였지만, 실은 로만 오팔카보다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로만 오팔카는 회화적 형태에 대한 탐구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로만 오팔카의 페인팅 작품들은 숫자들의 끝없는 나열들이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형태로, 현대 미니멀리즘 회화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 ..

시간과 존재에 대한 예술 - 온 카와라 & 로만 오팔카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심장이 뛰고 내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만나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일종의 가상이거나 허위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일 지도,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누군가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생각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어떤 픽션일 지도 모른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긋나고 내가 한 말은 오해되고 내 글은 무시되고, 내 사랑이 번번히 막다른 골목의 시궁창에 빠지게 될 지라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존재를..

Atta Kim: On-Air, 로댕갤러리

Atta Kim: On-Air 2008.3.21-5.25 로댕갤러리 사진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가 예술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술에 대한 사랑, 또는 호기심을 데리고 찾아간 로댕갤러리 안에서 나는 (현대)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바의 어느 극점을 발견하였다. 김아타의 이전 작업들, 뮤지엄 프로젝트나 해체 시리즈, 그 외 인물 사진 시리즈를 보았지만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분명 그 때도 그의 작업들은 비평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 속에서 그의 카메라가 가진 즉물적이며 파괴적인 속성이 싫었다. 나는 좀더 우아한 방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를 ..

시간이 싫어요.

인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롤러코스트. 무시할 수 없는 공포와 처절한 쓸쓸함과 슬픈 느낌으로 자욱한 길거리. 무수한 사람들로 빼곡하지만, 정작 손 잡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모호함 속. 결국 나 혼자 걸어가는 공포의 계곡길. (http://me2day.net/intempus) * * 토요일 아침, 흐릿하게 시작한다. 흐릿하게 시간을 흘러보낸다. 며칠 너무 정신 없었다. 며칠 너무 슬펐다. 며칠. 며칠. 며칠. 하긴 세상을 결정하는 건 단 1초다. 1초에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라갈 수도, 복원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싫다. 공간만 존재하는 곳. 그 곳이 있다면 이데아의 세계일 것이다. 그리스 고전철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성을 잃어버리고 공간을 향한다. 왜냐면..

루시와 그녀의 시간 Lucy and Her Time, 최재은, 로댕갤러리

Lucy and Her Time 최재은 - 루시의 시간 2007. 9. 21 ~ 11. 18 로댕갤러리 국내 대부분의 미술 잡지에서 이번 전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만 보자면, 높은 평가와 호응을 얻은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비평적 관점에서의 접근일 뿐, 일반 대중이 보고 공감하고 호응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전시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모호하고 추상적인 작품들 속에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끌어내기란 다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Lucy라는 이름은 1974년에 발견된 화석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25세 정도의 여성에, 키는 약 107cm, 몸무게는 28kg, 약 3백 20만년 전에 살았던 원시 인류의 화석이다. 특히 루시의..

김아타의 '온 에어(On Air) 프로젝트:뉴욕 타임스 스퀘어'

* 회화가 단색회화(모노크롬)와 텅 빈 캔버스를 지나쳐서, 더 이상 사유하기(thinking & meditation)를 그만두었다면, 이제 사진과 비디오가 그 사유와 명상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회화는 계속 사유하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 빌 비올라의 비디오 아트가 비디오로 명상하는 경우를 보여준다면, 김아타의 저 사진은 사진의 명상을 보여준다. *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의 범위는 비주얼 콘텐츠 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담고 있는 TV 브라운관이나 낡은 TV 외장까지도 포함시켜야 한다. 백남준 이후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비디오를 사유의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으나, 백남준은 그와는 달리 비디오/TV 라는 그 매체 자체에 매료당했다. 그래서 정신없고 현란한 백남준의 비디오 콘..

예술의 우주 2007.11.15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로댕갤러리 2007. 5. 18 - 8. 19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는 ‘시간의 배’에 승선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것은 몇 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사상의 영역에서 시간과 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진리는 시간을 떠나 영원성에 속해 있는 것이며 변하지(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플라톤은 한시도 이데아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고대를 지나 중세는 전지전능한 신을 내세웠고 이는 근대 초까지 계속 되었다. 시간과 운동은 하나의 짝이다. 이 둘은 사상의 영역에서처럼, 예술의 영역에서도 같이 등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를 담당한다. 레베카 호른의 작업들은 시간과 운동 속에서..

지나간 미래,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나간 미래 -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문학동네 지나간 미래 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 Reinhart Koselleck 지음, 한철 옮김, 문학동네 겨우 이 책을 다 읽었다. 대중 교양서라고 하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그렇다고 손을 놓기에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이라는 방대한 사전의 편집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그리 유명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 달 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는데, 읽고 난 다음 느낀 바를 크게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 역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실제 경험한 사실, 목격자의 증언, 또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은 ‘서사’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