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39

기러기, 메리 올리버

기러기 당신이 꼭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를 하며 무릎으로 기어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다만 당신 육체 안에 있는 그 연약한 동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 내게 당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라, 그러면 나의 상처에 대해 말하리라.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비는 풍경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산과 강 위로당신이 누구이든, 얼마나 외롭든세상은 당신의 상상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며 기러기처럼,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다시, 또 다시 네 자리가 있다는 걸,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 메리 올리버 장석주의 책, 을 다 읽고 짧은 서평을 올렸다. 최근에 책도 못 읽고 글도 못 쓴 탓에, 그 짧은 서평 쓰는 것도 힘들..

슈가 맨, 장정일

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나는 그게 지겨웠어.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

게으른 달력, 하기와라 사쿠타로

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죽은 전원시 지금 이 시간에 내 안데스의 사랑하는 동심초와 앵두 같은 리타는 뭘 하고 있을까;비잔티움은 날 질식시키고내 몸속엔 풀어진 코냑 같은 피가 잠을 청하는데. 하얀 오후에 속죄의 자세로 옷을 다리던그녀의 손들은 어디에 있을까;지금 비가,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가없이 내리는데. 그녀의 플란넬 치마랑 무슨 상관일까;그녀의 열망; 그녀의 걸음새;달콤한 사탕수수에 바친 노동. 문에 기대어 황혼 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겠지.마침내 떨며: "이런 ...... 오늘은 정말 춥구나!"한 마리 야생의 새도 울겠지, 기왓장 위에서. - 세자르 바예호 지음, 구광렬 옮김 세자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시다. 20세기 남미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독자에겐 생소하다. 나도 십수년 그의 이름..

노산군(魯山君), 자규시(子規詩)

오규원의 (문학동네, 1996년 초판)을 꺼내 읽는다. 그리고 늘 생각나는 시 한 편을 옮긴다. 우리에게는 단종으로 알려진, 노산군이 17세 지은 시(詩)다. 원통한 새가 되어서 제궁을 나오니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하늘도 저 애끓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노산군(魯山君), , 1457년. 17세의 사내가 지은 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1996년 이 시를 읽고 한참 울었다. 문득 이 시를 읽으며, 그 때의 상념에 젖는다. 이 시를 짝사랑하던 여대생에게 보내주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모한 짓이었구나. 시인 오규원 선생님이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 시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어느덧 내 영혼의..

리처드 브라우티건

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김경주 (지음), 문학과 지성사 시인 김경주의 소문을 듣고 이 시집을 산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이제서야 끝 페이지까지 읽었다. 실은 무수히 이 시집을 읽었고 그 때마다 첫 몇 페이지를 읽곤 숨이 턱턱 막혀와 더 이상 읽지 못했다. 그의 시적 상상력와 언어 구사는 탁월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이유로 다 읽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많은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했다. 젊은 시인들 중에서(최근에 시집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고, 내가 읽은 바 그의 첫 시집은 독창적인 시적 세계와 울림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여러 겹의 은유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음악으로,..

어떤 영혼들은 ... ...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잠자리에 들기 전 서가에서 낡은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어떤 영혼들은 ......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그리고 꿈과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이 있는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열정의 환영(幻影)들로 괴로워한다. 벌레 먹은과일들. 그림자의흐름과도 같이멀리서오는 타버린 목소리의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오래 익어왔다; 그건 시든다,불가사의로 어두운 채.환각에 침식당한어린 돌들은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모든 돌은 말한다: "신(神)은 멀리 계시다!" - 로르카, ,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3년. 이 밤, 로르카 시집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다. 강의백일몽 [개정]로르카저 | 정현종..

새로 산 시집 - 이병률, '눈사람 여관'

거의 1년 만에 시집을 샀다. 실은 1년이 더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한참동안 글을 썼고 아주 가끔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십 수년 전 일이니, 시집은 나로부터 참 멀리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사무실에서 이병률의 시집을 펼친다. ...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나도 건달이고 싶다, 철없이 로맨틱하기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