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10

아르보 페르트 CD 박스 세트

책도, 음반도, 인터넷이 등장하고 오프라인 상점들에서 사라져가니, 그 신비감도 사라졌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부재란 언제나 신비한 법이다. 예전엔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제한적으로 새 책이나 새 음반을 확인했고, 일부는 그런 경로로도 확인할 수 없어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가 지인에게 소개받거나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발견하는 보물들이 있었다. 그런 보물들은 대체로 소리 소문 없이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 깔리곤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떠돌 때쯤, 더 이상 살 수 없거나, 지방 도시 변두리나 시골 읍내 작은 가게를 뒤져야 겨우 나오는 진기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레코드판이 사라지고 시디가 주류가 되어갈 때쯤 상당히 좋은 음반들은 문 닫기 직전의 가게들에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검색하면 ..

뒤늦게 알게 되는 이들

가끔 영어로 된 신간들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한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 언어를 쓰는 작가들도 많을 것이며, 좋은 책들도 많을 것이다. 한글로 나오는 좋은 책들도 다 읽지 못하는데, 영어로는. 그래서 번역되지 않은 많은 작가들을 종종 그리워한다. 온라인 서점에 장바구니 목록에 영어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있다. 제대로 읽을 능력도, 시간도 없으면서. 영어 공부를 틈틈히 하고 있으나, 쉽지 않다. 겨우 현상 유지만 할 뿐이고 영어로 된 비즈니스 아티클 정도 읽을 수준이다. 대화는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한두달 휴직계를 내고 캐나다 같은 곳에 단기 어학 연수가면 어떨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나마 음악은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다. 먼저 멜로디를 듣고 가사를 되새긴다. 가..

절판과 우연성

눈 여겨 보던 책이 절판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인터넷서점 안, 그 책이 있던 페이지였는지, 아니면 장바구니였는지, 혹은 이메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사려고 마음 먹은 그 책을 뒤로 미루는 사이, 그 책이 이제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안내를, 절판된 후 이 책을 구할 수 없음을 나는 직감한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샀다. 인터넷으로 책이나 음반을 구입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열광적으로 기뻐했다. 책이나 음반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원하는 책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특히 음반은!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 두 번 이상 신문 기사나 인터넷 서평으로 놀라운 찬사가 이어진, 정말 형편없는 쓰레기 책을 구입한 후, 믿을 수 있는 저자가 아니라면, 오프라인 서점에 나가 ..

스트레스의 극복

각자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극복 방법이 있다. 나도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 간단하게 적어본다. 1. 스트레스를 받는 일/공간/시간을 벗어나자. 하지만 이제, 이것은 불가능하다. 대체로 밥벌이와 관련되거나 어쩌지 못하는 인간 관계, 또는 불가항력적 상황일 경우가 더 많아졌다. 예전엔 아예 그냥 잠수를 타기도 했지만, 이젠 그럴 시기도 아니다. 2. 술을 마신다. 그냥 소주를 마셔선 안 된다. 조용하고 아늑한 바에서의 몰트 위스키 한 잔이거나 좋아하는 와인을 좋은 음식과 먹는 것. 살짝 사치스러워야 한다.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수준의. 예전에 자주 가는 단골 술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마시길 좋아했으나, 이젠 그 단골 술집도 문을 닫았고, 음악을 들으며 마시다 보면 내일이 사라지다..

음반들, 그리고 우리들의 기다림

몇 번의 이사,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생의 변화 앞에서 음반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한 때 자신들의 소리를 보여줄 도구들마저 없었을 때, 아마 그들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주중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전, 음반들 한 무더기를 꺼내 한 번 정렬해 보았다. 다들 오래된 음반들이다. 심지어 존 케이지(John Cage)를 연주한 음반도 눈에 보이지만, 몇 번 들었던가, 언제 마지막 들었던가, 그런 기억마저도 없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아줄 이를 만났을 때에만 그 빛을 발한다. 그건 그녀도, 그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대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알리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구차하고 쓸쓸한 일인가를, 한 번이라도 ..

필소굿 Feels so good

척 맨지오니의 저 LP가 어디 있는가 찾다가 그만 두었다, 술에 취해. 몇 해 전 일이다. 혹시 결혼 전 일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술에 취한 채 이 LP를 찾았는데,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 사이 나이가 든 탓에 찾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도 있다'는 서술어이 가지는 느낌은, 젊었을 때는 '가능성'이었으나, 나이가 들면 무너진 터널 앞에 서 있는 기차같다. '수도 있다'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무모하게 시도했다는 의미다. 가령, '그녀와 키스할 수 있었는데', '그녀에게 고백할 수 있었는데', 혹은 '사랑하던 그를 붙잡을 수 있었는데' 따위의 표현들과 밀접한 연관를 갖는다. 결국 생명이란 생명의 지속과 연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그 시작은 작은 만남과 사랑으로 포장..

음악 소비는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

* 기사 출처: 비즈니스인사이더 뉴스레터를 보다, 이제 스트리밍은 음악 소비의 미래가 아니라 그냥 이제 다 스트리밍으로 소비한다(is the new normal)는 분석 기사를 읽었다. 하긴 나도 유튜브로 스트리밍으로 듣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편하게 느낀다. 하드웨어와 통신 인프라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음악 유통의 모습까지 변화시킨다. 유튜브의 새로운 서비스 '유튜브레드'도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유통/소비 형태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되는 콘텐츠의 질과 성격까지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콘텐츠 창작자들이 주목해야 될 부분은 여기다. 1. 뮤직비디오나 라이브 음악 영상의 유통이 늘어날 것이다. (단순히 음원만 스트리밍하는 것보다) 2. 기존 오프라인 유통 시장은 계속 줄어들다가 하이엔..

새벽을 견디는 힘

CANDID 레이블. 지금은 구하지도 못하는 레이블이 될 것이다. 집에 몇 장 있는데, 어디 꽂혀있는지, 나는 알 턱 없고. 결국 손이 가는 건, 역시 잡지 부록으로 나온 BEST COLLECTION이다. 레코드포럼, 매달 나오는 대로 사두었던 잡지, 그 잡지의 부록은 클래식 음반 1장, 재즈 음반 1장. 제법 좋았는데. 유튜브가 좋아질 수록 음반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하기 힘들던 시절의 아련함은, 우연히 구하고 싶은 음반을 구했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아는 이들을 불러모아 맥주 한 잔을 하며 낡은 영국제 앰프와 JBL 스피커로 밤새 음악을 듣던 시절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벨앤세바스티안의 사랑

벨앤세바스티안... the boy with the arab strap. ... 그들의 신보 나오는 것도 신경쓰지 못할만큼 늙었다. 둔해졌다. 흘렀다. 조용해졌고 약해졌다. 뜸해졌고 사라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기타소리는, 드럼소리는, 시디 음반 안에서 시간 정지 중이었는데... 나는, 그는, 그녀는, 우리는 한 번 마주쳤던 따스한 눈길을 두 번 다시 마주하지 못했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사랑도 식상해지기 마련인 어느 7월 여름밤... 문득 시디 속에 갇혀있던 사랑이 떠오른다.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사라 본Sarah Vaughan의 낡은 테잎을 선배가 하는 까페에 주고 난 다음, 난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앨범을 샀다. 영화 때문에 나온 '2 for 1' 모 음집. 예전부터 들어왔던 음악이 영화나 광고 때문에 유명해지 면 기분이 나빠지기 일쑤다. 누군가에게 음악을 추천하면 대체 로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음악이 영화나 광고에 서 유명해지면 내가 권했다는 사실을 잊고선 그 음반을 사선, 이 음악 좋지 않냐고 내게 말한다. 이건 소설이나 책 따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면 잘 듣지도 않다가 교수나 유명한 작 가가 이 책 좋으니 읽어보라고 하면 바로 산다. * * '1963년에 이파네마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1982년의 이파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