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16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최근 새삼스럽게 뒤라스를 다시 읽으면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라스를 찾아 읽는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뒤라스를 읽지 않았던 사이, 낯선 그녀의 책들이 번역되어져 있었고, 아직도 뒤라스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감동했다. 사람을 만나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던 시절이 이제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그 때가 그립다.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사랑에 빠졌던). 올리비아 랭와 데버라 리비의 글에서 만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책에서의 뒤라스와 겹친다. 올리비아 랭에게 뒤라스는 (과격하게) 술을 좋아했던 예술가 뒤라스였다면, 데버라 리비에게서 뒤라스는 남다른 통찰을 보여준 여성 작가였다. 연기는 텍스트가 가진 것을 오히려 덜어 낼 뿐, 아..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나의 간장(肝臟)이여 잘 있거라 신장과 췌장하고도 이별이다 나는 이제 죽을 참인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 너희들에게 인사한다 오래도록 나를 위해 일해주었지만 이제 너희들은 자유다 어디로든 떠나는 게 좋다 너희들과 헤어져서 나도 몸이 가뿐해진다 혼만 남은 본래의 모습 심장이여 때때로 콕콕 찔렀구나 뇌수여 허튼 생각을 하게 했구나 눈 귀 입에도 고추에게도 고생을 시켰다 모두 모두 언짢게 생각하지 말기를 너희들이 있어 내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너희들이 없는 미래는 밝다 이제 나는 나에게 미련이 없으니까 망설이지 말고 나를 잊고 진흙에 녹아들자 하늘로 사라지자 언어가 없는 것들의 동료가 되자 에 실려있던 시 한 편을 옮긴다. 이제 노인이 된 시인이, "아무래도 젊은 시절에는 쓸 수 없는..

2월을 물들이는 스산함, Hoc erat in votis

우리에게 삶의 희망이나 목적 같은 건 없고 사랑이라거나 미래 따윈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노력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주 오래 전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의 을 읽은 다음의 내 감상평이었다. 늘 다시 읽고 싶은 책이지만, 늘 다른 책들에게 밀려 손 안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서가 사이로 돌아가지만. 어쩌면 시의적절한 포기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은 아닐까. 아는 분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너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니'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멈칫 했다. 글쎄, 나는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지금 다니는 회사를 코스닥 상장까지 시키는 것, 또는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것, 아니..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지음), 이주환(옮김), 읻다, 2016 미끈한 뱀의 움직임을 흉내 내면서 사랑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때, 우리는 절망하여, 이어질 것도 생각 않고 다음날들을 남겨두었네 멍청하게도, 성당 앞자리에서 훌쩍거리는 교구 재산관리인처럼 아, 픽션이여, 위안을 주는 네 몸을 꼭 껴안을 만한 제 남성적 정력을 의심하며, 역겨움 느껴가며, 편집증적으로, 확신도 없이, 우리는 녹색 마법 물약을 동물적인 행복감에 젖어들 때까지 들이켰네 지나고 보면 슬픔이란 더욱 좋은 강장제 나무에 피는 접시꽃보다도, 따스한 키니네보다도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채, 각자의 플라톤적 지옥에 이르렀다네 기묘한 호랑이에게 살해당한 심장까지를 드러낸 채 괴혈병을 이겨내고, 루이 금화를 씹어..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When Breath Becomes 폴 칼라니티(지음), 이종인(옮김), 흐름출판 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New names unknown, old names gone:Till time end bodies, but souls none.Reader! then make time, while you be,But steps to your eternity- Baron Brooke Fulke Greville, "Caelica 83"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세월..

샘 쉐퍼드Sam Shepard

내가 수줍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샘 쉐퍼드Sam Shepard가 73세의 나이로, 수다스러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했던 이 세상과 헤어졌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재능이며, 그의 언어가, 그의 표정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며 혼자 숨겨두었던 존재들이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연결고리는 없겠지만, 모나드 바깥에선 단절된 모나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 때 생각했지만, 태어남-죽음은 하나의, 일체의 모나드임을.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궤도를 돌아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궤도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주자. 샘 쉐퍼드를..

뒤러Durer, The Knight, Death and Devil(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레비나스의 '죽음'

일요일 저녁, 레비나스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하는 실존이라는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로 떨어져서 우리를 엄습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 ...) 현존보다 더 영향을 미치는 파열, 선험성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