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12

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자본가의 탄생 The Life and Times of Jacob Fugger 그레그 스타인메츠(지음), 노승영(옮김), 부키 푸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서문에 나온 아래 문단만 읽어도 된다. 책은 이 요약문의 자세한 설명이며 역사적 근거와 시대적 배경을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카를이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푸거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푸거는 카를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거액의 뇌물을 빌려주었을 뿐 아니라 카를의 할아버지에게 자금을 투자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정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중앙 무대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왔다. 푸거는 다른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그는 고리대금업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교황을 설득해 상업을 중세의 미몽에서 흔들어 깨웠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눈물들, 파스칼 키냐르

눈물들Les Larmes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지음), 송의경(옮김), 문학과지성사 키냐르, 때때로 생각나는 이름. 그러나 한동안 읽지 않았던 작가. 오랜만에 한 권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 을 읽은 후, 감동을 받은 후,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었는데,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어쩌면 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 10여 장으로 구성된 10권의 책이라는 좀 특이한 목차를 지닌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프랑스어가 태어나는 순간'의 현장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247쪽) 역자의 설명대로 이 책은 최초의 니타르Nithard에 대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니타르(라틴어로 니타르두스 Nithardus)는 842년 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를 2세와 동프랑크 왕..

수도원 맥주 유럽 역사를 빚다, 고상균

수도원 맥주 유럽 역사를 빚다고상균(지음), 꿈꾼문고 책을 읽고 난 다음, 맥주 생각이 나긴 했다. 하지만 젊은 하루키의 소설만큼은 아니다. 맥주를 간절히 원하게 만드는 건 역시 맥주 소개서가 아니다. 와인 가이드를 보며 와인 생각이 간절해지지 않듯이. 수도원 이야기(혹은 종교이야기)와 맥주 이야기를 섞어놓았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역사책도 아니고 전문적인 맥주 소개서적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 걸쳐있는 산문집 정도. 루터의 부인이자, 한때 수녀이기도 했던 카나리나 본 보라의 맥주 제조 실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쉽게 읽히고 재미있지만, 나같은 독자에겐 적당하지 않다. 그냥 맥주 전문 서적이었으면 더 흥미진진했을 텐데, 맥주 이야기와 수도원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며 자주 애매해지..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신뢰할 만하며 단테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어떻게 근대 문학의 시초가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예증한다. 단테 문학의 변화와 성장은 이 책의 중심 테마이며, 을 향해간다. 인간에 대한 단테의 미메시스는 고전 고대의 미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미메시스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단테는 고전 고대처럼 인간을 아득히 떨어져 있는 신화적 영웅으로 보지도 않았고, 중세 시대처럼 인간의 윤리적 타입을 추상적으로 혹은 일화적으로 재현하지도 않았다. 단테는 살아있는 역사적 리얼리티 속의 인간, 단..

뒤러Durer, The Knight, Death and Devil(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초현실주의

노트를 정리하다가 메모 해놓은 것을 옮긴다. 수지 개블릭의 당연한, 하지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다. 보스와 초현실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설명의 용이성 탓이지, 실제로 보스가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스의 작품은 지극히 후기-중세적이고 고딕적이다. 신의 세계가 가졌던 호소력이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 정오를 향해가면서 사라져갈 때, 그 안개를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의 작품은 먼저 중세말, 근대초의 심리적 방어를 위한 공포적 상상력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외부의 제어 수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신의 세계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고, 보스는 ..

바로크 - 근대와 중세의 종합

찰스 테일러의 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

중세 속의 아르보 페르트

슬픈 중세주의는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세기의 낭만적 중세는 거침없는 산업화 속에서 사라지고 20세기, 21세기의 중세주의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동경, 숙고, 찬미로 바뀌고 있다. 마치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듯. 그 사이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아르보 페르트가 있다. 미니멀리즘과 중세적 성스러움 속에서 그는 미사곡과 성가곡을 작곡한다. 그의 음악은 슬프고 그리운 중세를 닮아있다. 불가능함을 불가능함으로 받아들이고 자연과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중세를... 오늘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을 듣는다.

중세의 가을,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옮김) 문학과 지성사 책을 다 읽은 지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여러 번 책을 꺼내 읽으며 노트를 했지만, 쉽게 소개 글은 씌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으니, 나는 거의 십 년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완독하지 못했다. 자끄 르 고프의 ‘서양중세문명’을 금방 완독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 책에 대한 내 느린 독서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은 두툼하고 활자는 작으며 문장은 길다. 제 1장의 제목은 ‘삶의 쓰라림’이고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

서양문화의 역사2, 로버트 램

그림과 함께 읽는 서양 문화의 역사 2 - 로버트 램 지음, 이희재 옮김/사군자 깔끔하게 요약된 이 책은 혼자 읽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다. 나같은 독자는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많은 정보에 비해 짧은 설명이 서양 문화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빠져든 서양 문화사는 너무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현대 사회나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버트 램의 이 시리즈는 혼자 읽기 보다는 대학 교양 수업의 교재로 적당하다. '후기 중세: 확장과 종합'라는 챕터 제목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면 일종의 발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문화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교의 위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보상으로서의 확장과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