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 6

LP바의 방랑

(신림동 우드스탁. 어두워서 사진이 엉망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라디오에 연결해서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 장정일, 턴테이블에 레코드판. 이것도 꿈이라면 꿈이었다. 하지만 서재에 있는 턴테이블과 레코드에 먼지가 쌓이기 일쑤다. 들을 시간도 없고 같이 들어줄 사람도 없다. 무관심해졌다. 음악을 듣는다고 삶이 윤택해지면 좋겠지만, 딱히 그렇게 되진 않더라. 하지만 그래도 마음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아는 음악이 나왔고 모르는 음악이 흘러갔다. 그 선율을 따라 알코올도 내 혀와 식도,..

어느 토요일의 일상

적당한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는 기분을 좋게 한다. 음악은 종종 놀라운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다. 어제 미루던 오디오 구입을 감행했다. 하이탑에이브(www.hitopav.co.kr) 사무실까지 가서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구입할 수 있는 예산은 한정되었던 터라, 살 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배달되어온 마란츠 인티 앰프, 데논 턴테이블, 그리고 와일퍼데일 북쉘프 스피커, 그리고 서재 바닥에서 먼지를 먹던 온쿄 시디 플레이어를 연결해 듣고 있다. 동네 가구점에서 급하게 사온 책장을 눕혀 레코드판을 넣고 사진에서 보듯, 오디오를 책상 아래에 배치했다. 낮엔 거의 한 달 반만에 독서모임을 했다. 칼 포퍼 탓이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은 오직 플라톤을 공격하기 위해 씌여진 듯한 느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LP를 책상 밑으로 옮겨놓았다. 1년 넘게 창고에 있다가 겨우 밖으로 나온 녀석들이다. 이 사이엔 젊은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 차이코프스키는 참 매력적이다. 위 영상은 에밀 길레스(Emil Gilels)의 연주다. 피아노가 부서져라 치는 그의 연주는 에밀 길레스의 상징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저 연주는! 강철과 같은 타건 때문에 연주회에서 자주 피아노현을 끊었다고 하는 길렐스에게 있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피아니즘을 상징하는 이모티콘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프리츠 라이너와의 50년대 스테레오 녹음(RCA)과 1970년 로린 마젤과의 ..

오래되었다는 건

오래되었다는 건 견딜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영이다. 누군가가 1979년 화신백화점에서 구입한 낡은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견딘다는 것, 견디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종일 파란 하늘이 부러웠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잠을 잤고 오후 내내 운동을 했다. 고통을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반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 적절한 고통이 필요한 것일까. 저녁이 되면 바람은 낮아지고 사람들은 집 구석으로 몰려들어 수다를 떤다. 새들도 제 집으로 들어가고 거리를 지나는 차들은 경쟁하듯 불빛을 키우고, 나는 외출을 서두른다.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

일요일 오후

혼자 뒹굴뒹굴거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질 줄 알았더니, 그렇지 못한 것이... 이런 일요일 오후엔 도대체 뭘 하면 좋을까. 새벽까지 책을 읽는 바람에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오랫만에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에 근처 시장에 가 봄나물과 김치찌게를 위해 두부와 버섯을 사왔다. 가는 내내 봄 햇살인지 늦겨울 햇살인지 구분되지 않는 빛 알갱이들이 퍼석퍼석 썩어가는 내 얼굴에 와닿아 부서졌다. 잠시 바람이 불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장 안을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엉덩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엉덩이만 보면 아줌마인지 처녀인지 구분할 수 있다던데, 도통 모르겠다. 집에 들어와 이름 모를 봄나물을 간장과 고추가루가 주축이 된 양념장에 버물려 김..

크리스마스 이브

몇 달 전 턴테이블이 두 개 있을 때의 지저분한 내 방의 일부 어제 방 청소를 했다. 방청소라고 해 봤자 특별한 것도 없다. 이리저리 널린 책과 음반을 한 곳으로 모아놓고 방바닥을 한 번 쓸고 한 번 닦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도 두 시간이 걸리니, 방 위에 놓인 게 책과 음반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쌓인 잡동사니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TV 뉴스를 보고 알았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 탓이다. 하긴 크리스마스야, 아이들 세상이니 아주 어정쩡하게 끼인 나이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 따위를 기대한다면 그건 무리다. 방에 앉아 척 멘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과 케니 드류의 피아노, 벨앤세바스티안의 초기 앨범을 오가며 듣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꺼낸 것이 베트벤 교향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