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느 가을 일요일

지하련 2009. 11. 1. 15:30


Stanley Jordan, Autumn Leaves 

 
최근 술을 마시면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이, 끝까지 마시는 경우가 잦아졌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알콜에 대한 자제력이 있었고, 무사히 봄과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자제력 상실은 꽤 나를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다. (아마 내게 뭔가 견디기 힘든 어떤 일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억누르는 과정의 반작용가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늙은 육체의 어린 마음은 언제나 흐릿한 흰 빛의 안개로 쌓여 모호할 뿐이다.)

어제는 몇 주만에 운동을 했다. 몸이 뜨거워지고 얼굴은 땀으로 버벅이 되었다. 예전엔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는데, 요즘엔 운동을 하고 온 몸이 땀으로 뒤덮일 때 살아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년 초에 행사가 하나 있으나, 그 일엔 거의 손을 못 대고 있다. 더구나 낮에 다니는 회사에선 재무 파트까지 관여하게 되어, 회계 관련 공부까지 해가며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올 가을 기억에 남을 전시 몇 개가 열린 것을 알고 있으나, 보러 가지 못하고, 종종 좋은 작품을 만나더라도 시큰둥해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항상 나는 바빴다. 지금도 바쁘다. 여름 아트페어 때, 아시는 분이 마치 나를 위한 변명처럼 '용섭씨, 장가 안 가길 다행이다. 장가 가서 그렇게 바쁘게 살았으면 벌써 쫓겨났을 거야'라며 웃으셨다.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요즘 내 모습을 보면, 마치 실패하지 않은 인생임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악착같음만 남은 느낌이다. 그리고 종종 일상의 악착같음 사이로 쓰다만 소설이 떠오르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이 가치있음을 드러내 주고 싶다, 싶었다. 그렇게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스치고 지나가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연말에는 몇 개의 연주회를 챙겨볼 생각인데, 혼자 가는 건 늘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오래 살아가고 있는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아직 음악이 뭔지, 문학이 뭔지, 미술이 뭔지, ... 실은 여자와의 만남이라든가 사랑이 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도대체 여자를 모르겠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무엇을 이해하면 더 이상 그것은 쓸모없어진다. 따라서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음악을 만든다.'
- 로라 플레처와 토머스 무어와의 인터뷰 중에서, 1983년


그래서 나는 사랑을 바라는 걸까. 이해되지도 않는 연애를. 결국 이해하지 못한 채 상처만 입을.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서울옥션 도록을 펼쳐보다가, 온통 녹색으로 뒤덮인 그림 하나를 보며 좋아했다. 양달석(1908 - 1984)의 '소와 목동'이라는 작품이다. 거제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부산에서 활동한 지역 작가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편안하게 표현한 작품들로 유명하나, 그리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쓸쓸한 어느 가을 일요일, 이런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편안해지고 한결 부드러워짐을 느낄 수 있다. 오늘 행복한 사건들로만 채워졌으면 좋겠다. 아니 내 생의 모든 시간들이...... 


서울옥션 도록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