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깊고 부드러운 와인을 마셨다. 붉은 빛깔이 나는 알콜은 원래 바람이 지나는 풍경을 나풀거리는 가로수의 잎사귀로 알아차릴 수 있는 커다란 유리창 안 한적한 공간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일상이 가져다 준 긴장한 마음을 잠시 풀고, 피곤에 지친 몸을 낡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한동안 그러지 못하리라.)
용산 후암동에 위치한 이탈리안 식당. 남산도서관 인근의 독일 문화원 옆 주차장 아래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일 비노 로쏘(IL VINO ROSSO)에서 나는 이 와인을 마셨다.
샤또 세규르 드 까바냑(Chateau Segur de Cabanac) 2003.
오래된 와인을 마실 때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오후 일찍 시작해 해질녁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이 어울린다. 첫 느낌은 마치 잠을 덜 깬 듯한 오래된 밋밋함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와인이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질감이 입 안을 에워싸리라. 하지만 일 비노 로쏘의 요리들도 와인 만큼 감동적이었다.
은은한 부드러움이 이 와인의 특징이었다. 워낙 구대륙의 무거운 와인들을 좋아하던 터라, 도리어 샤또 세규르 드 까바냑은 가볍지 않으나, 그렇다고 무겁게 느껴지는 와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절한 산미와 부드러움은 입 안을 기분 좋게 해주었으며, 식사를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