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고전주의
플라톤이 인간 존재를 완전한 세계(존재의 세계)에서 불완전한 세계(생성의 세계)로 추방된 존재라고 말했을 때, 그 속에는 존재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하는 플라톤 철학의 의도가 담겨져 있으며 동시에 불완전한 세계에서 완전한 세계로 향해 가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고전주의의 절정기가 막 끝나가는 무렵을 살았던 플라톤 철학은 종종 그리스 고전주의의 철학적 반영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것은 그가 이데아를 상정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완전으로부터 불완전이 나왔으며 이 불완전은 영원히 완전을 향하여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플라톤 철학이 가지는 기본적인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플라톤 철학이 그러했듯이 그리스 고전주의 양식은 완전함을 향해간 양식이었다. 즉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여, 완전하지 못한 어떤 대상을 영원히 정지해있으며 완전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양식인 셈이다. 그리고 뮈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은 이러한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뮈론, ‘원반 던지는 사람’
후기 고전주의
기원전 431년 그리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 시민을 기리며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도시가 평범하기만 한 도시는 결코 아닙니다. 어떠한 다른 도시도 우리만큼 많은 정신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일년 내내 경기와 제사가 있고 우리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공공 건물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 … 우리는 지나침이 없이 미를 사랑하고 비굴함이 없이 지혜를 사랑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부는 단지 허영을 위한 재료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성취를 위한 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가난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을 진정한 불명예로 여길 따름입니다. … …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우리들의 도시는 하나의 전체로서 그리스에 대한 한 본보기입니다. 모든 구성원의 평등, 정신적 독립성, 다방면의 업적, 육체와 두뇌의 완전한 자립 등올 인해서 우리들의 도시가 산 교육의 장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리스 고전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아테네와 그 주변에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현대와 비교할 것은 못 되지만, 기원후 1600년 경의 아테네가 폐허더미 속에 오두막 몇 채들이 있었던 것에 비한다면, 이 당시 그리스 아테네가 누렸던 물질적 풍요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물질적 풍요가 예술적 만족이나 성취를 가지고 오는가 이다. 예술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는 이 문제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 즉 물질적 풍요와 예술적 성취와의 정해진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 시대마다 어떤 측면에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지만 때로 전적으로 다른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당시,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경 그리스, 특히 아테네에서는 물질적 풍요가 문화예술적 성취와 학문의 융성을 동시에 수반하였음을 분명한 사실이었다. 저 페리클레스의 연설 속에서 우리는 당시 그리스의 언어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음을,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 속에서 한때 지중해를 호령했던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리십포스와 프락시텔레스의 양식도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체로 딱딱한 느낌을 주던 폴리크레이토스의 조각상에서 리십포스와 프락시스텔레스의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조각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개인과 사회(국가)의 균형과 조화가 무너지면서 개인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예술 작품들은 어떤 이상이나 당위로서의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느낌이나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하며, 극단적으로는 사사로운 장식으로까지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고전주의가 개인주의의 발달에 일정 부분 기반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개인주의는 그 고전주의가 뒤로 후퇴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철학과 서사양식에서는 냉소주의가 물들기 시작한다)
리시포스의 조각
프락시텔레스의 조각, ‘헤르메스’
헬레니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쥐게 되지만, 스파르타에게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끌고 갈 힘이 없었다. 이 때부터 지중해는 여러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의 패권을 쟁탈하기 위한 몇 세기의 혼란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헬레니즘이라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쇠퇴기의 양식이며 바람직하지 못하고 천박한 양식으로 평가 받았던 예술 양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어떤 남자의 머리’, 델로스에서 출토, 기원전 80년경, 청동, 기원전 80년경, 높이 32.4 cm,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테네
‘죽어가는 병사’
이제 세계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하나의, 정치경제적이며 학문적, 정신적 중심은 사라졌으며 사람들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새로운 것들 뿐이다. 이미 위대한 과거는 사라졌고 눈 앞에 보이는 건 혼란스러운 모습들 뿐이다. 걸핏하면 전쟁이 나고 어제까지 만났던 이가 전투에서 죽어버리는 시절이 온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를 지탱하기도 힘든 시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이게 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시작한다.
헬레니즘 양식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극단화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의 체계가 무너졌지만, 그 체계의 유산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체계의 유산 속에서 이질적인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적 세계 속에서 용납되지 못했던 그 어떤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의 그리스 문화 속으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경우에는, 어떤 원리에 의한, 그리고 그것으로 수렴 가능한 자연주의적 양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눈 보이는 대로 나타낼 수 밖에 없는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헬레니즘 조각들은 표현적이고 동적이며 애절하고 자극적이며 흥분을 자아내게 된다.
라오콘 군상
‘사모트라케의 니케’, 기원전 200년경, 대리석, 높이 244 cm, 루브르 박물관
하지만 사람들은 위대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예술 작품에 ‘실험적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예술가가 새로운 현상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양식적인 변화나 전적으로 다른 표현을 하는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헬레니즘 예술가들은 실험적이었으며, 그 시도는 라오콘 군상이나 니케 상에는 성공적이었다.
변해가는 것, 움직이는 것을 어떤 고전적 원리를 통해,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처절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의 소산이 아니라 자신감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 자신감을 되찾기 위한, 하지만 끝내 그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의 산물이었다. (* 바로크 양식과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를 향해가고 있었던 양식이었다.)
로마의 예술
기원전 700년경의 에트루리아 문명으로부터 로마는 시작된다. 기원전 5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상에서는 당시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현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에트루리아 문명보다는 헬레니즘 문명에 속해있었다.
헬레니즘 양식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하였다면 이제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북유럽, 북아프리카까지 포함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로마의 예술 양식에는 ‘~주의’ 같은 단어가 붙지 못하게 된다. 즉 로마는 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민족들과 지역들로 이루어진 제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단일한 양식이 지배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게 되었으며 또한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몇몇 특징적인 양식들이 나타나지만 그리스 고전주의나 헬레니즘 시대와 비교해서 그 예술성이나 감동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들은 그리스나 헬레니즘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예술만의 자율성을 상실하였고 감동보다는 즐거움이나 유희의 대상이거나 또는 국가나 가문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공공 미술적 양식으로 전락해버렸다. 초상조각의 무덤덤한 표정은 지도자의 권위, 가부장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의 건축은 로마 사회가 외양적으로는 얼마나 굳건하고 체계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양식이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긴 복도와 계단, 몇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에서 그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건축공학적으로도 놀라운 걸작이었다.
콜로세움, 72-82년, 로마
판테온
하지만 콜로세움의 건축공학적 기술은 판테온에서는 또다른 기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판테온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투박하고 무거워 보이는 외양과 달리 내부의 모습은 화려하고 신비적이며 종교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외부와 내부의 분리는, 어쩌면 로마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 전까지 로마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범람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들은 대체로 내세적이었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띄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플로티누스의 철학 사상은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로마인들은 국가의 의무에 충실히 복무했고 가문의 전통에 누가 되지 않으려 행동했으며 물질적인 풍요와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풍요와 자부심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이나 전통을 기반으로 할 때에만 빛날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로마는 그렇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적이었던 것일까. 즉 현실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아닐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드>는 이러한 로마 건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희생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 개인을 바라보는 연민까지 담겨있다. 한 쪽으로는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개인을 닮고자 하는 시선이 있으며 한 쪽으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희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공적 세계 속에서는 전자를 취했지만 사적 세계 속에서는 후자를 택했다. 이러한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는 로마의 사회가 초기 신분 기반의 사회였다가 후기에는 계약 기반 사회로 넘어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과도한 개인주의는 개인중심주의로 나아가며 그리고 아예 공적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로마의 회화 양식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기원전 20년경, 대리석, 높이 203 cm, 바티칸 박물관(로마)
아라비아인 필리푸스 황제, 244-249년, 대리석, 실물크기, 바티칸 박물관.
아마 폼페이의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로마 시대의 회화 양식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면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회화 양식은 이전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양식으로, 또한 로마의 건축이나 초상조각과도 극히 다른 양식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치밀하게 사실적인 표현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딱딱하고 무덤덤해 보이는 조각상과 달리 회화 양식은 몽환적이며 화사하게 꾸며져 있다.
이러한 조각 양식과 회화 양식의 단절은 앞에서 이야기했던 바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각 양식은 공공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회화 양식은 집 안에, 개인의 즐거움과 향락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단절에서 우리는 국가의 이상이나 가치, 혹은 가문의 전통(* 로마 시대에는 전적으로 가문적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였다)과 개인의 이상과 가치가 분리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의 분리와 단절은 사회 속에서의 개인을 고립시켰고 공적 영역의 가치와 의무는 사적 영역 속의 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무엇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사회는 신분적이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일원화되고 체계적인 것에서 계약적이며 황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무관한 다른 체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개인은 공적 사회와 격리되고 공허해지면서 일회적인 재미나 저 세상에나 있을 법한 환상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되는 회화 양식은 이러한 로마 시민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폼페이 유적의 벽화 1.
폼페이 유적의 벽화 2.
폼페이 유적의 벽화 3, 플로라.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방의 이민족들은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왔으며 로마 사회 내부에서는 동방의 여러 신비스러운 종교들이 급속도로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 때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들 중에서,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종교였다. 그리고 그만큼 강력하고 혁명적인 종교였다. 공적 영역에서 이탈해가는 로마 시민들은 한 쪽으로는 환상을 쫓으면서 공허를 달래고 있었으며 한 쪽으로는 종교에 대한 심취로 정신이 나가 있었던 셈이다.
- 위 글은 2004년 초에 쓴 노트입니다. 이 때 서양미술사를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였고, 그 해 말에 작은 서양미술사 책을 공저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내고 난 다음, 미술 관련 책은 거의 팔리지 않고(인문학책보다도 더), 진지한 책은 아예 전공자들조차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ㅡ_ㅡ;; 미술사는 참 흥미롭고도 진지하며 그 어떤 인문학 분야보다도 통찰력을 전해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치긴 하네요.책을내고 난 뒤 미술사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여 노트를 계속 업데이트했는데, 언제 다시 책으로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