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렘브란트와 짐멜

지하련 2019. 1. 22. 23:11





짐멜의 <<렘브란트>>를 열심히 읽고 있다. 2018년 독서 결산 포스팅도 못하고, 작년 연말에 읽었던 몇 권의 책 서평도 못 쓰고 있다. 대신 짐멜을 열심히 읽고 있다. 책은 딱딱하고 난삽하지만, 마치 뵐플린이 양식의 측면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조망하듯, 짐멜은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를 르네상스, 혹은 그 이전의 예술가들과 보편성/개별성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근대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은 개별성에 집중하면서 각 인물마다 개성적인 포즈와 역동성을 부여하여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걸작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 독서는 늘 파편화되어 있는 탓에, 절반 정도 읽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구절도 없이 어렴풋하게 펼쳐질 뿐이다.


여유라도 되면 '짐멜 읽기' 모임같은 거라도 하면 좋을련만. (몇 년 전 운영하던 독서모임도 개점 휴업 상태이니...)



 


이래저래 '신세한탄'에는 술만한 친구도 없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친구는 혼술이다(그 외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맥주 하나를 꺼내 마셨다. 


뭔가 제대로 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책이나 글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고 아직까지 오디오는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디들은 구석에 벽처럼 쌓여있어, 그 누구도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담긴 시디를 꺼내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은 꺼내지 못하고 죽는 것일지도. 어쩌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죽는 것일지도. 


연초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마치 궤도를 이탈한 별처럼,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게 자유라면, 그런 자유는 이 거대한 자본주의 속 메트로폴리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에밀 시오랑처럼, 내 태어남 자체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하는 걸까. 그런 걸까. 


한참 나이 먹은 나에게, 아직도 세상은 낯설기만 하다. 그도, 그녀도, 사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