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나의 사유 재산, 메리 루플

지하련 2022. 6. 11. 22:13

 

나의 사유 재산 My Private Property 

메리 루플Mary Ruefle(지음), 박현주(옮김), 카라칼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15쪽) 

 

결국 나(자아)를 알거나 너(타자, 외부, 세계)를 알게 될 뿐, 나와 너를 동시에 알고 받아들이진 못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도서관 2층 카페 의자에 앉아 살짝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찰들이 모두 젊어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더 들었다면 만족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화를 냈을 것이다. 자기자신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니, 저 우연의 세월에 맡겨 사는 것이 다라고 젊지 않은 경찰들이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 글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였다. (그런데 나는 젊지 않고 메리 루플도 젊지 않은데. 1952년생이니, 노년을 보내고 있을 터이다. 젊게 산다는 게 무얼까 자주 생각하지만, 이제 더 이상 앞으로 젊어지지 못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삼십년 전의 젊음과 지금의 젊음은 전혀 다른 무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젊어진다고 한들, 그건 지금의 젊음이 아니다.)

 

최근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딱딱한 책보다는 편하게, 띄엄띄엄, 아무 때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되는 책을 찾게 된다. 그렇게 고른 책이 메리 루플의 산문집이었다. 시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산문집이다. 그리고 색깔을 이야기하는 글들은 모두 좋았다.  

 

파란빛 슬픔은 가위로 길게 잘라낸 뒤 다시 칼로 잘게 썬 달콤함이다. 그것은 백일몽과 향수鄕愁의 슬픔이다. 가령 그것은, 이젠 그저 기억일 뿐인 행복의 기억일 수도 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기에 먼지를 털어낼 수 없는 틈새 속으로 물러나버린, 선명하지만 먼지투성이인 파란빛 슬픔은 그 먼지를 털어내지 못하는 당신의 무능력에 기인한다. 그것은 하늘 만큼 멀리 있어 닿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사실의 슬픔을 비추는 사실이다. 파란빛 슬픔이란 당신이 잊어버리길 간절히 바라지만 잊을 수 없는 무엇이다. 마치 버스에서 불현듯 벽장 속 먼지 뭉치를 머릿 속으로 아주 또렷하게 그려볼 때처럼. 이는 참으로 기이하며 남과 나눌 수 없는 생각이라 나는 얼굴을 붉힌다. 그러면 진한 장미빛이 슬픔의 파란 빛 사실 위로 퍼져가며 오로지 어느 사원에나 비견할 만한 상황을 빚어낸다. 그 사원이란,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거길 찾아가기 위해선 눈신발을 신고 개썰매를 타고 이천 마일을, 말 등에 올라탄 채 오백 마일을, 보트를 타고 또 오백 마일을 간 후에, 철도로 천 마일을 가야만 하는 곳이다. (25쪽~26쪽)

 

 

 

뭔가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할 때, 메리 루플의 글들은 상당한 위로가 될 것이다. 몇 주전 주말 내내 메리 루플을 읽었다. 좋은 작가를 만났다. 충분히 서정적이면서도 위트가 있다. 고백의 절제를 안다. 그래서 글을 읽는 이들은 루플의 언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딱딱하다. 물렁물렁한 서정의 틈으로 빠져들 때쯤 루플은 이건 내 이야기지, 네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 산문집에서 아래 문장이 가장 좋았다.

 

덧붙이는 말: 색깔을 다룬 각각의 글에서 '슬픔'이라는 단어 대신 '행복'이라는 단어로 넣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슬픔이든 행복이든 달라질 건 없다. 오늘 같은 내일이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라져 있겠지. 메리 루플의 사진을 보면서 그녀의 글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숲 속을 헤맬 때 나는 언어에 이끌린다. 어둡고 젖은 수풀 안에서 의미가 예스럽게 숨겨진 채로 마구 자라나는 것을 본다. 나무 뿌리들과 오래된 벽들 곁에서, 죽은 잎사귀들 사이로, 기이하게 쓸쓸한 기운을 풍기며, 어떤 야생의 특성을 암시하며, 비엔나의 옛 풍경을 묵묵히 떠올리게 하며 자라나는 모습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하지만 말이다. (109쪽) 

 

조심스럽게 메리 루플의 산문집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