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내일보다 나은 오늘이 존재한다면,

지하련 2024. 11. 18. 20:20

 

미래란 중요치 않은 것이 되어버렸고, 신탁의 신에게 질문을 하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으며, 별들은 이젠 하늘의 궁륭에 그려진 경탄할 만한 그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 때만큼 큰 희열을 느끼며 섬들이 흩어져 있는 수평선 위의 창백한 새벽빛과, 끊임없이 철새들이 찾아드는, 요정들에 바쳐진 서늘한 동굴들, 황혼녘에 무겁게 날아가는 메추라기떼를 바라본 적은 그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나는 여러 시인들의 시를 다시 읽었다. 몇몇 시인들의 작품은 옛날보다 더 좋아보였지만, 대부분은 더 나빠 보였다. 그리고 나 자신이 쓴 시는 여느 때보다 덜 불완전한 것 같았다.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중에서 

 

흔들리는 소음들도 가득찬 좁은 지하철 객차 안에서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저랬던 오늘이 있었나 생각했다. 근대 이후와 이전을 구분할 때,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고대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근대로 나눌 수 있다. 진보란 다윈의 진화론과 결부된 사회과학이 만들어낸 개념이면서 동시에 근대 부르주아와 도시 노동자계급이 만든 꿈이고 이상이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오늘의 고통을 견딘다. 그 고통의 끝에 또 다른 절망이 있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을까. 그럴 지도. 

 

오늘 자기 전에 벨앤세바스티안을 듣고 자야지. 그러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꿈 여행을 떠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