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현실과 꿈 사이에 있을 숲 속 그 곳

지하련 2007. 7. 23. 10:20



사랑의 정원이 된 숲
내 몸 어디에서도 고된 노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틈 날 때마다 그 흔적을 지우고, 또 지우고, 지우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탓이다. 자줏빛 뿔테 안경을 끼고 한 손에는 낡은 수필집을 든 채, 매일매일 전투 같은 일상을 보내는 직장인으로써가 아니라 책 읽기와 산책으로 소일하는 한가로운 룸펜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고 웅변하고 싶은 것이다. 현실을 떠나 꿈 속 세계로. 내가 원했지만, 절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세계로.

Fete Galante. 우아한 축제. 그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턱이 없지만, 아름다운 무희가 춤을 추고 한순간도 술잔은 비는 법이 없으며, 새가 사랑을 노래하고, 얇은 바람이 시샘하듯 내 머리칼 위를 머무르며 즐거움을 훼방 놓으려 할 때, 어김없이 사랑하는 이의 입술이 내 입술로 와 닿는 그런 세계. 18세기 로코코의 귀족들은 거칠고 힘든 현실을 떠나 솜사탕 같은 가벼운 달콤함으로, 봄바람 같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꿈결 같은 세계로 향한다. 이 때 숲 속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사랑의 공간이 되고, 그 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잠시 고된 현실의 삶은 잠시 잊고 눈앞에 펼쳐진 꿈결 같은 즐거움에 빠지자. 그녀의 사랑스러운 고백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허리로 손을 가져가며 살짝 그녀를 끌어당긴다. 달빛이 투명한 호수의 물결 위로 미끄러지듯 그녀의 몸이 내게로 향해오고 숲 속은 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수놓으며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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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tes Venitiennes>
Antoine Watteau, 1718-19년
캔버스에 오일, 56 x 46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로코코 양식의 위대한 예술가 장 안트완 와토의 세계이자, 상승하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서서히 몰락해가는 귀족의 세계다. 그리고 달콤하고 화려한 색채로 충만한 이 세계는 부드럽고 느린 걸음으로 1789년의 불타는 파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그래서 Fete Galante는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현실 속에서 자리 잡지 못한, 인정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채, 자신의 시대와는 멀어지는 토지 귀족들의 불편함이, 비겁함이, 그리고 끝내 몰락해버릴 한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숨어있다. 물질적 풍요로움과 대비되어 나타나는 정신의 박약함은 숲 속을 현실과 멀리 떨어진 꿈 속 세계로 변화시키고 절대 버림받는 일 따위는 없는 사랑의 정원으로 만든다. 하지만 꿈은 현실 앞에서 언제나 부서지고 사랑은 끝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 때 숲은 쓸쓸한 도시가 되고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이 되고 지금은 되돌릴 수 없는, 감미로운 과거의 순간이 된다. Fete Galante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애상이다. 그것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현실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금방 꺼져버리고 말 꿈 속 사랑을 향해가는 감미로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와토의 작품 대부분이 우리에게 가라앉은 우울함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론 꿈속으로

사방엔 산들이 벽처럼 늘어섰고 구름과 안개는 가렸다가는 피어오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숭아나무로 햇살에 얼비치어 노을인 양 자욱했다. 또 대나무 숲 속에 띠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혀 있고 흙섬돌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이며 개, 소와 말 따위도 없었다. 앞 냇가에는 조각배가 있었지만 물결을 따라 흔들거릴 뿐이어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 중에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57쪽에서 재인용)


끝내 유배지에서 그 생을 다하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수상한 세상을 보며 자신을 아끼던 안평대군과의 사이를 끊어 그 생을 유지했던 안견(安堅). 이 둘을 떠올릴 때면, 그림과 무관한 세상살이를 되새기게 된다. 하지만 꿈 속, 복사꽃 흩날리는 꿈 속 세상에 걸어 들어간 안평대군은 수상한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요하고 향기로운 꿈 속 풍경에 넋을 잃은 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사라진 그 곳에 서서 ‘그 정경의 쓸쓸함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고 읊조린다. 그는 무슨 이유로 쓸쓸함에서 신선(神仙)을 떠올린 것일까. 그리고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요, 시, 문, 서, 화, 악에 능했던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서른여섯의 나이로 안평대군은 유배지 강화에서 쓸쓸히 죽고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를 뿌린 듯 골짜기의 봄꽃만 붉다’던 어린 단종도 강원도 영월에서 끝내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루하루 힘들게 견디는 현대의 직장인이 밥벌이의 흔적을 끝내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안평대군은 현실에서의 쓸쓸함을 꿈 속 세상에까지 가지고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꿈 속 쓸쓸함을 보며, 그 쓸쓸함을 받아들였을 때, 신선이 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세상은 거칠기만 하다. 그럴 때, 18세기 프랑스의 귀족들이 꿈꾸고 와토가 그렸던, 안평대군이 꿈꾸고 안견이 그렸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이상향을 떠올려보자. 그러면 잠시나마 삶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아니 가벼워질 거라고 믿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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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안견, 1447년, 비단에 수묵 담채, 38.6 x 106.2cm,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글. 김용섭
(현재 직장인으로,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미토)라는 예술사 책의 공저자이다.)

(* 월간 <숲>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오랜만에 미술과 관련된 원고 청탁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썼습니다. 하지만 필력은 예전만 못한 듯하네요. ㅡㅡ; 저자 약력은 편집진에 의해 수정되었습니다. 현재 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문장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