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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우아함

습기 찬 더위가 온 몸을 휘감아 도는 토요일 밤, 책상 등과 벽 사이에서 종의 탄생 시절부터 이어져왔을 생의 본능 같은 거미줄을 치던 거미와, 낡은 대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란스런 공중파 오락프로그램 소리로 뒤범벅이 된 거실에서 낮게 에프엠 라디오 소리가 흐르는 안방으로 가로질러 들어가던, 윤택이 나는 짙은 갈색 바퀴벌레를, 1년 째 온갖 벌레로부터 내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에프킬라로 잡았다. 그리고 새벽까지 악몽에 시달렸다. 혼란스런 고통의 새벽이 끝나고 평온한 일요일 오전을 보낸다. 밀린 빨래를 세탁기로 돌리고 물끄러미 창 밖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내 시선은 두텁게 쌓여있던 습기의 벽에 가로 막혔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빨리 회사가 정리 단계에 ..

달려라, 아비, 김애란 소설집

달려라, 아비 김애란 소설집, 창비 쉽게 읽히는 문장, 가끔 보이는 재치 있고 재미있는 표현, 하지만 그 정도? 나라도 혹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 젊은 소설가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김애란의 소설들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덤덤한 관찰의 시선이다. 무덤덤하게, 나(주인공)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적극적 행위의 주체로 나서지도 않고, 극적인 심리적 갈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정치경제학적 환경마저도 벗어나, 이 세상, 이 사회에 대한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특정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기만을 계속할 뿐이다. 심지어는 추억도 없다. 미래도 없다. 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상상이거나 공..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로댕갤러리 2007. 5. 18 - 8. 19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는 ‘시간의 배’에 승선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것은 몇 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사상의 영역에서 시간과 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진리는 시간을 떠나 영원성에 속해 있는 것이며 변하지(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플라톤은 한시도 이데아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고대를 지나 중세는 전지전능한 신을 내세웠고 이는 근대 초까지 계속 되었다. 시간과 운동은 하나의 짝이다. 이 둘은 사상의 영역에서처럼, 예술의 영역에서도 같이 등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를 담당한다. 레베카 호른의 작업들은 시간과 운동 속에서..

오늘의 세계적 가치, 브라이언 파머

오늘의 세계적 가치(Glabal Values 101) 브라이언 파머 외 엮음, 신기섭 옮김, 문예출판사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그런데 서평보다는 간단하게, 그리고 강력한 어조로, 16명의 반-정부적이며 반-기업적이고 반-시장적인 학자, 활동가, 기업인, 언론인들이 나와 하버드대 학생들과 나눈 대화 하나하나 모두 주옥같아서, “무조건 사서 읽어보세요! 이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에요!"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16명의 실천적 지식인들, 가령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여러 실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과 하버드 대학생들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이 세계를 올바른 방..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Presque Rien Sur Presque Tout)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 지음, 유정희 옮김, 문학세계사, 1997 Story는 시간 위에서 인과적 관계를 이루며 진행된다. 드라마가, 영화가, 그리고 위대한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선 Story가 사라진 독백으로 가득하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내가 보기엔 좀 있어 보이는 문장들로 구성된, 난해한 수필집이라고 하는 편이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정의내리기에 가깝다. 그런데 수필집으로 정의내리더라도 이 책은 독서의 재미에서는 한..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리사아 후라도 공저, 김홍근 편역, 여시아문, 1998년 어렸을 때 곧잘 절에 가곤 했다. 할머니 손을 붙잡고, 어머니 손을 붙잡고. 때론 산 중턱에 있는 절 옆 계곡에서 놀기도 했다. 스님을 만나기도 했으며 부처의 일생을 보여주는 TV 드라마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읽었다. 짧게 불교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보르헤스가 알려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보르헤스가 누구였던가. 그는 20세기 후반 최고의 제 3세계 소설가이면서 포스트모던 픽션의 대가이다. 그리고 지난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지나갈 때, 보르헤스도 그 열풍의 한복판에 서서 많은 독자들을 즐겁게 주었던 소설가였다. 예전만..

거미

리움에서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와 만났다. 매우 탁월했다(이 표현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얇은 봄바람이 거미 다리 사이를 지나치며 소곤거렸다. 자연과 공상 사이에서 자리잡은 채, 거친 황무지 같은 도시를 걸어다닐 듯한 느낌으로 위태로웠다. 장석남은 거미에서, 거미줄에서 그리움을 노래했는데, 부르주아는 생각이 많이 다른 듯했다. 그녀의 거미는 날아오르거나 걸어다니고 싶어했다.

예술의 우주 2007.06.15

강희안, <고사관수도>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 노자가 이랬다. "천하에 물보다 더 연약한 것도 없지만,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기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강희안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 스스로 물같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물은 너무 멀리 있고 몸은 바위에 기대고 있으니,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시간 따라 물도 흐르고 마음도 흘러 갈피 잡을 수 없는 시절로 향해 가고 있건만.

예술의 우주 2007.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