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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라틴어수업

한동일(지음), 흐름출판 



집에 있던 '라틴어-영어 사전'을 최근 버렸다. 이십여년 전 구한 사전이었다. 그 때만 해도 한글로 된 라틴어 교재는 거의 없었고 라틴-한국어 사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책을 읽으며 라틴어를 확인하는 용도로라도 필요하겠다 싶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출판사에 나온 작은 사전을 교보문고 외서 코너에서 구했다. 원서 강독을 하면서 자주 그 사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 십 수년이 지났고 더 이상 집 서가에 책을 꽂을 공간이 없어 읽은 책들과 앞으로 더 이상 읽지 않을 책들을 버리는 중, 빛 바래고 낡은 그 사전도 함께 버렸다. 그리고 몇 달 후, <<라틴어 수업>>이라는, 이 책을 읽었다. 


<<라틴어수업>>,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딱 그 정도였다.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은 이들에게 다소 섭섭하게 들릴 지 모르겠으나, 나같은 이에게 이 책은, 절반 정도는 아는 내용이고 나머지 절반도 한 때 배웠으나(읽었으나),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거나 다소 식상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도리어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준비하며 읽어야 하는 추천 도 목록을 보며 기겁한 나에게, 이 책을 읽거나 한동일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감동받은 대학생들의 후기나 추천을 보면서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더 심각해졌을려나. 그 땐 술자리와 데모에 끌려다녔다면, 지금은 학자금 대출과 구직난에 시달리고 있으니(그 땐 방학 때 노다가라도 제대로 하면 한 학기 학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일부의 경우이긴 했지만)


이 책은 라틴어 경구들과 라틴어를 둘러싼 이야기, 자신의 이탈리아 유학 이야기, 로마의 역사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건 다 라틴어이고 그걸 빼면 다 쉬운 이야기들이다. 대부분 평범하나 교훈적이고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조언들이다. 하지만 이 책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런 조언들을 들을 수 있는 장소도, 선생도, 그럴 기회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면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 혹은 그런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차단된 건 아닐까. 


이제 몇 년 만 더 있으면 삼십년이 되지만(벌써!), 복학생이었던 나는 '우리 과를 졸업하면 어디로 취직하나요?'라는 후배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취직하러 우리 과에 들어왔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전공을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그 후배도 직장인이 되었고 나도 직장인이 되었다(하긴 지금 돌이켜보면 전공을 최선을 다했다고 한들 내 밥벌이가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며 도리어 까칠까칠한 부적응자에 낙오자 비슷해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땐 직장 걱정을 지금처럼 하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지만, 나만큼 그런 것에 무신경한 사람도 없었다. 그 땐 아마 될때로 되라는 식이기도 했고, 내 주위엔 가정사나 개인적 번민 등으로 온통 힘들어하는 청춘 밖에 없었다. 선배들과 친하지 않았고 후배들과 친하지 않았다. 학과 밖에서 놀았고 학교 밖에서 공부했다. 대학 도서관은 사랑했으나, 대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만큼 좋아했던 탓에 그만큼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나는 한동일 교수의 교회법에 대한 전문 서적이 더 궁금하다. 저자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지만, 서양의 역사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시대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모더니티나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소포클레스나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고 스콜라철학과 유명론, 고딕 성당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교회에서 벗어나 세속 도시로 나오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 법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법의 관점에서 그 흐름을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상당히 어렵겠지만.  


이 점에서 이 책은 산뜻하고 가볍다. 읽기 어렵지 않고 쉽게 대화하면서 인생이 어떤 것인가 조심스럽게 묻게 만든다. 나에겐 없는 능력이다. 나는 그냥 대놓고 묻는 스타일이다. 나 또한 그렇게 배웠으니까. 나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은 모두 대학 밖에 만났던 분들이었고 까다로운 질문들을 툭툭 던졌다. 그런데 그 질문들 하나하나가 나 자신을 끊임없이 묻도록 만들었다. 


인문학이 힘든 이유는 그 학문이 어렵고 까다로운 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 근거를 끊임없이 묻는다는 데에 있다. 마치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되는 어떤 이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구애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같은 느낌이랄까.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에게 진실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진실된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으나, 돌이켜보니 다 변명이었고 내 그릇된 오해와 이기심이었다. 나는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듯 싶다. 방황했으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 도전을 했으나, 늘 중간에 그만 두었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을 만든다. 그러니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Nolite ergo esse sol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sibi 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태오복음 6장 34절) 





라틴어 수업 - 8점
한동일 지음/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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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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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지음), 주은정(옮김), 디자인하우스 




지난 주 마르셀 뒤샹 전에 대한 리뷰를 올리면서 잠시 참고했던 책이었다. 말 그대로 '뒤샹 사전'이다. 마르셀 뒤샹(또는 현대 미술 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무척 유용하지만, 그저 현대 미술에 대해 일반적 이해만 가진 이들에겐 다소 쓸모가 떨어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뒤샹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하지만, 이와 연관된 도판 이미지는 없다는 점은 일반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음을 드러낸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뒤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으니, 사전의 유용성이 없진 않았다. 어쩌면 탁월할 지도 모른다. 뒤샹과 연관된  대부분의 키워드들을 담고 있을 테니, 뒤샹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책에 나온 몇 개의 인용을 옮긴다. 


1913년 20대 중반이었던 뒤샹은 "'미술'작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 "왜냐하면 미학적인 감정을 언어적 묘사로 옮기는 것은 정말로 겁먹었을 때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처럼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 24쪽 


"상업주의가 너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인데, 나는 돈과 예술의 결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순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물에 탄 와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60쪽 


"나는 아담과 이브 이래로 세계 곳곳에서 대체로 반복해온 철학의 진부한 문구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언어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거부한다. 언어는 잠재의식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단어를 통해, 그리고 단어에 따라 생각을 만든다. 나는 적어도 이와 같은 단순한 의미에서 내가 유명론자라고 기꺼이 선언한다." - 167쪽 


"예술에서 진보란 없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않지만 문명에는 진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에는 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 192쪽 



"뒤샹과 창작의 관계는 모순적이어서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 그의 창작물은 그의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관조하는 사람들에게 속한다."

"뒤샹은 처음부터 개념을 그리는 화가였고 그림을 순전히 손과 눈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레디메이드는 양날의 무기이다.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 변모하면, 그것을 훼손하려는 제스처가 중단된다. 그러나 그것이 중립을 지키면 그 제스처를 예술 작품으로 전환시킨다."

-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182쪽 

(* 뒤샹은 옥타비오 파스가 쓴 글을 좋아했다.)







뒤샹 딕셔너리 - 8점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주은정 옮김/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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