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1002

일요일 오후 노들섬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소리 없이 다가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내 정신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종일 책상에 앉아있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그저 불안했다. 나이가 들수록 이번 생은 어딘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만 떠오른다. 불안에 대해서 최악의 처방전만 있다. 그것은 고개 돌리기, 외면하기, 회피하기, 도망가기, 망각하기. 서울시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 근처로 나왔다. 가을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들은 연신 브레이크를 잡으며 자신의 자전거 타기 실력을 뽐내고 한강대교까지 가는 동안 동네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날 수 있었다. 이 근처에서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구나. 보통은 여의도 한강 시민 공원까지 가든지, 동작대교를 지나 반포대교 남단까지 갔다..

창을 열면, ...

팔을 들어 길게 뻗어 책상 너머 있는 창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한 쪽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공기를 보며 바람이라고 썼지만, 그냥 온도 차이로 생긴 공기의 사소한 흐름일 게다. 밤새 닫아 두었던 서재의 창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내가 지내온 서재, 혹은 책들이 모여 있던 곳의 창 밖 풍경은, 대체로 건조한 무채색이다. 하늘을 볼 수 있었던 서재는 딱 한 번 뿐이었고, 나머지들은 모두 벽들 뿐이었다. 지금 서재 창 밖은 바로 옆 빌라의 측면 외벽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창들이 있는. 서재에서 이십미터 정도 걸어 나가면 마을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있고, 그 곳으로부터 다시 이십미터 정도 나가면 시내버스가 다니는 도로, 다시 그 곳으로부터 이십미터 정도 가면 지하..

숲 속에서의 책 읽기

제목이야 저렇게 달았지만, 여유로운 풍경이라기 보다는 도망쳐 나온 것이다. 소년원 출신 시인 장정일이 그의 첫 시집에서 '도망 중'이라는 글귀를 사용했을 때, 절반만 공감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제 그도 이제 환갑이 되었고 나도 쉰이 되어간다. 돌이켜보니, 늙었다는 기분에 잠긴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젊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종종,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저 침묵의 우주가 가진 절망스러운 무한함에 대해서도. 몇 명의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그 사람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데, 엄청나게 힘에 부친다. 계속 구인공고를 올리지만, 대졸 신입도 지원하지 않는다. 회사는 매년 성장해 이제 직원 수만 150명 가까이 되는 디지털 에이전시가 되었지만,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

2021년 8월, 사무실 오후 8시 38분.

서재에 있는 오디오로 음악을 듣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서재에 에이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더위 속에서 책을 읽을 그 어떤 여유도 나에겐 없다, 없어졌다. 물질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면 정신적으로나마 여유롭길 바랬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고 어느 정도 실패라든가 아픈 것이나 후회하는 경험들이 쌓이자, 물러서지 않는 원칙 같은 것이 하나 둘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프로젝트는 망가지더라도 사람을 잃지 말자'다. 그런데 막상 (나도 모르게) 프로젝트를 챙기다보니, 사람을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너무 힘들다.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야 했는데, 그걸 잊어버렸다. 그만큼 믿기도 했겠지만, 늘 그렇듯 말 없는 믿음보다 말 있는 믿음이 더 낫다. 프로젝트 규모가 커졌다...

misc. 2021.07.25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 사무실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냥, 살짝 가슴 떨리며, 내일로 미루어버렸다, 집에서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오후 내내 잠만 잤다, 이 더위 속에서. 뒤늦게 일어나 중국집에 저녁을 시키곤 바닥에 누웠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핸드폰이 없었을 땐, 뭘 들고 누웠을까. 특별함이 없는 일상 속에서 뭔가 특별함을 바라는 게 이상한 일이다. 회사 일도 그렇고 사람 관계도 그렇고 내 머리나 가슴도, 아무렇지 않게 식어간다.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 지난 프로젝트에선 두 명의 직원이 회사를 그만 두었고 한 명의 프리랜서는 일을 대강 하고 그만 두었다. 고객사로부터는 인정을 받았지만, 나도 그렇고 참여한..

서울과 이천 사이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그 프로젝트 생각만 한다. 나머지들은 우선 순위가 뒤로 밀린다. 때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는다. 한 달 이상 이천에 내려가 프로젝트 마무리를 하고 있다. 다음 주면 끝인데, 쉽지 않다. 극강의 디테일과 단호함으로 무장한 고객사 담당자 앞에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실은 그런 디테일은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전에 비해 디테일이 강해지긴 했으나, 나는 빠른 결정과 실행에 우선 순위를 두고 디테일은 속도 앞에서 뒤로 밀렸다. 하지만 둘 다 가질 때 난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지 잘 아는 탓에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번엔 무너졌다. 상당히 힘든 과정이었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어있다. 이런 저런 일들이 ..

일요일 출근

출근을 했다. 평일에는 전화, 회의, 출장 등으로 정신이 없으니, 주말에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그렇다고 엄청 여유로운 것도 아니어서 쫓기는 듯한 기분은 어쩔 수 없구나. 다들 이런 걸까. 아니면 나만 이런 걸까. 적당히 쓸쓸하다. 기분 좋은 쓸쓸함이랄까. 그냥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그리운, 하지만 슬픈 감정이랄까.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엘 들려 시집 구경이나 해야 겠다. 그것으로 사소한 위안으로 삼아야지.

아픔이라는 이름의 성장통

바람직한 미래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그것은 반드시 고통과 아픔을 수반한다. 그것이 성장통이라면 좋겠지만, 때로 그것은 절벽이거나 지옥이거나 나락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그게 끝일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가 맹인이 되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알레고리다. 우리는 아픔을 딛고서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며,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 속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꿈, 우리가 왜 아파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여야만 한다. 무엇을 잘못 했으며,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꿈도, 일도, 사랑도. 수십년 전 술 한 잔 마시면 외우던 시 한 편 있었다. 그런 삶을 꿈꾸었는데, ... 나이가 들어도 그 시 구절은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

PC 바탕화면을 바꾸다, 조지 시걸

사무실 PC 바탕화면을 바꾸었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조지 시걸의 82년도 작품, 'Wendy with chin on hand'로 옮겨간다. 조지 시걸. 내가 사랑하는 작가. 작품 활동 초기, 살아있는 사람의 전신을 라이프캐스팅(Life Casting)하던 시기를 지나 일부만 떨어져 나온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떨어져 나온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나 그리움,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의례 그래야 되는 시기가 왔고 그래서 일부만 떨어져나왔다. 살아있는 사람을 본을 떴다고 해서 라이프캐스팅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은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살아있어도 죽은 듯이 살아야할 때가 있고 죽었으나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우리 옆에 머물기도 한다. 이 작품을 보고 너무..

봄 날을 가로지르는 어떤 기적을 기다리며

시간이 흐른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나이가 들고 상처 입고 죽는다. 이유없음은 저 실존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테마였지만, 그 무목적성 앞에서 그들도 무릎 꿇었다. 내던져진 존재.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치열하게 부딪히며. 봄이 왔지만, 내 마음 속으로 봄은 깃들지 못한다. 봄꽃 날리는 거리를 걸었으나, 그 때의 봄이 아니다. 하긴 나에게 봄이 있었던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하지만 우리 삶은 기계론적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다. 이 생은 저 감당하기 힘든 우연성으로 포장된 어떤 것이니, 내가 기댈 곳은 어떤 기적 뿐. 그 기적 아래에서 싹트는 고백과 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