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세계-사이, 최정우

지하련 2025. 5. 4. 23:39

 

 

세계-사이 

최정우(지음), 타이피스트 

 

 

워낙 시간이 파편적으로 변한 탓에, 자연스럽게 짧게 읽을 수 있는 산문집에 먼저 손이 가게 된다. 꾸준하게 하루에 한두시간 씩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최정우의 글을 읽다보면, 문장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지적 측면이 희석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곧잘 하게 된다. 자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파리에 머무르면서 그동안 쓴 글들 - 일기를 포함해서 - 을 모아 펴낸 것이다. 일상 이야기도 있고 문학이나 철학, 예술에 대한 글도 있다. 대부분 길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의외로 금방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기준에서의 근대 예술이 예술 작품이라는 사물 자체의 유일무이한 아우라aura로부터 가능했던 것이라면, 현대 예술은 그 작품이라는 사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예술로 만드는 일종의 '기체화'된 상태, 곧 분위기atomosphere와 경향tendance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은 "미학의 승리 le triomphe de l'esthetique" 다시 말해 미학 자체가 예술을 대체하는 체제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에술은 작가만의 영역을 떠나서, 한 편으로는 미술을 분류없이 분류하며 아카이빙 없이 아카이빙하는 미술관, 거대 기업의 미술 재단, 미술 시장 등의 영역에서 더욱 경제화/금융화되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SNS나 장소특정적 예술 행위 등을 통해 어디에나 '공기'이자 '분위기'로서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 이브 미쇼 (392쪽) 

 

그(이브 미쇼)에 따르면 현대의 미학적 체제는 과-미학화hyper-esthetisation라는 현상으로 요약된다. 과거에 예술이라고 불렸던 것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거의 모든 것들이 과도하게 '미학화'된다는 것이다. (392쪽) 

 

이브 미쇼의 번역된 책들을 보기는 했으나, 읽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뒤늦게 알게 된다. '기체화'라는 단어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나 또한 그렇게 여기고 있었으나,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방향 잃음(상실)에 가깝다고 여겼다. 그래서 방향을 찾게 된다면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미학화'는 다소 다른 지점이다. 그러니 미쇼의 지적이 더 설득력 있다. 번역된 미쇼의 책들을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상력이 이미지들을 형성하는 능력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상상력이란 차라리 인식을 통해 마련된 이미지들을 탈형성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우리를 원래의 이미지들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 이미지들을 변형시키는 능력이다." - 바슐라르 

 

그리고 바슐라르는 잊고 있었다. 서가 어딘가에 <촛불의 미학>이나 <물과 꿈>같은 책이 있을 텐데. 바슐라르는 어쩌면 '상상력으로 무한증식하는 이미지들'를 떠올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 문장을 읽고 했다. <공기와 꿈>은 읽고 싶은 책들 목록에 언제나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나에게 문학이론은 너무 오래 잊고 지낸 분야였다.  

 

예수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백 배 양보해 이를 희석하고 중화시킨다고 할지라도, 복음서들 안에서 공히 묘사된 예수는 차라리 이상적 공산주의자, 그러니까 그 가장 넓은 의미에서 '빨갱이'에 더 가깝고 ... (325쪽) 

 

역사적 예수는 원래 혁명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현재 극우화된 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해봤자, 어떤 설득력을 지닐까. 종교와 신앙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푸념같은 문장이지만, 메모해 놓았다. 이런 식으로 인용해서라도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평론은, 아니 비평critique은, 자아가 타자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단순한 줄 세우기나 점수 매기기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자아의 조건들을 깊이 성찰하는 자기 - 죽임과 다시 - 태어남 사이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이기 때문이다. (389쪽) 

 

가끔 비평이나 평론을 쓰게 되면, 저런 식이 된다. 수십 년 전 어느 화가의 전시 평문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 화가의 작품들과 내 사연을 겹쳐 그 화가의 작품이 가지는 속성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했더니, 전시기획자의 눈에는 예술 작품은 가려지고 내 이야기만 부각되었다고, 상당히 불편한 시선을 나에게 던진 것이 기억났다. 아직도 가끔 글을 쓰기도 하지만, 내 전문 분야가 아닌 게 된지 오래되어, 이런 기억마저도 사치스럽게 되었다. 

 

의외로 재미있게 읽힌다. 내가 읽으려고 했던 그의 다른 책들은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여 초반을 읽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번 책은 쉽게 읽혔고, 잊고 있던 몇 명의 이름들을 마주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