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17

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Le Goût de l'archive 아를레트 파르주(지음), 김정아(옮김), 문학과지성사 그 순간의 삶을 설명하는 몇 마디의 말과 그 순간의 삶을 단 번에 우리 앞에 끌어내는 폭력 사이에 간신히 낀 채로 존재하는 삶들이다. (36쪽) 작년 마지막 몇 달간 읽은 책이다. 짧고 단단하다. 역사가가 어떤 이들인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왜 진실한 지 그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다. 그러니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착각은 역사가 궁극적으로 진실을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착각이다. 역사는 세부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실 담론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 어법, 정격(학문적으로 엄정한 형..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에두아르트 뫼리케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에두아르트 뫼리케(지음), 윤도중(옮김), 문학과지성사 두 편의 짧은 소설이 담긴 이 책은, 순전히 모차르트가 들어간 제목 때문이었다.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까. 놀랍도록 감동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는 예술가 소설의 전형과도 같다고 할까. 이 소설은 추천한 만하다. 찬사를 받을 만하다. 여기에 반해 는 동화 이야기에 가깝고(역자는 '동화'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다채로움이나 전개방식도 흥미롭지만, 나에겐 가 더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모차르트의 형상화 때문일 게다. 천재 예술가 모차르트를 어떻게 표현해내는가라는 측면에서 뫼리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오래된 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좋을 듯 싶..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지음), 문학과 지성사 생각보다 많이 읽혀지는 책이라는 데 놀랐다. 2015년에 나와 벌써 24쇄를 찍었으니, 인문학 서적으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책이다. 어느 수준 이상의 깊이를 가진 국내 학자의 책이라는 점도 좋고 적절한 시각에서 우리가 아닌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도 좋다. 이제 한국의 민족주의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논의가 시작해야 시기에 이 책이 가지는 인문학적 성찰은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둘만한 보들레르의 작은 산문들을 모았다. 각각의 산문들은 19세기적인 묘한 매력과 허를 찌르는 감각으로 채워진다. 는 너무 유명한 산문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 지금 나이로 보자면, 문학청년 시기쯤으로 분류될 이십대 중반에 쓴 산문이다. 그 스스로도 이렇게 살지 못했을 텐데, 이런 충고를 썼다는 건 그만큼 문학 활동에 자신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은 그의 생애 전반에 나타나는 바이기도 하다) 시란 가장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는 예술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20쪽 이런 놀라운 사..

충분하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얼음의 책, 한유주

얼음의 책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렇다고 긴 문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의 호흡은 한결같이 짧고 반복적이며, 작가 한효주의 숨소리가 문장들에 어김없이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던 '있다'와 '없다' 사이 어디쯤 자리잡고 앉아있었다. 그 숨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이 소설집을 읽는다. 그리고 읽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를 지나, 작년을 지나 올해 봄까지.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자기 주장을 펼쳤고,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이 들고 늙어가는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상처 입으며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늙어가는 우리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 혼자 웅크리고 말을 잃어버..

니힐리즘과 문화, 고드스블롬

니힐리즘과 문화(Nihilism en Culture) 고드스블룸(Johan Goudsblom) 지음, 천형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49쪽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 죽는다. 자신이 이상주의자인지 현실주의자인지, 고전주의자인지 낭만주의자인지, 플라톤주의자인지, 반-플라톤주의자인지. 심지어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동시에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고드스블룸이 니힐리즘을 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자 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 니힐리즘이 일종의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어 대중화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두 번..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루이지 피란델로

나는 고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Il fu Mattia Pascal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지음), 이윤희(옮김), 문학과지성사 "예, 그럴 겁니다! 백작은 이른 아침, 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났다. ... ... 백작 부인은 목 둘레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라일락 꽃무늬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 ... 테레지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 ... 루크레지아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 ... 오,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습니까? 우리는 한줄기 태양광선을 채찍 삼아 쉼 없이 회전하는 보이지 않는 팽이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연유도 모른 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게 때로는 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선사하고, 혹은 쉰 번쯤 혹은 예순 번쯤 회전한..

피로사회, 한병철

피로사회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베스트셀러가 된 철학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의 . 몇 해 전 이 책으로 떠들썩할 때, 나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책의 내용보다는 마케팅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초 집 근처 구립도서관 서가에 새로 들어온 책 서가에 한병철 교수의 몇 페이지를 읽고 난 다음, 바로 그의 책 세 권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놀라웠다고 할까. 단정적인 논조였지만, 일관성이 있었고 나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고 해야 할까.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