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17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

연극과 기억, 안치운

연극과 기억 - 안치운 지음/을유문화사 안치운의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 2007)을 읽었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지면에 쓴 연극평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여간 읽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문제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심연을 가로질러가 무대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글은 살아남기 위한 표현이되 노력이다. 비평가의 글은 살아남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니던가. 공연을 재현하는 비평은 공연의 표현이다. 삶이 삶의 표현이듯이. 비평 없이도 연극은 가능하지만, 연극 없이 비평은 불가능하다.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이야말로 비평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꿈이다. 그렇지만 비평이란 글은 결코 ..

한국 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강수미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강수미 지음/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탐미와 위반, 29인의 성좌 강수미(지음), 현실문화 미술비평가란 존재는 낯설다. 기묘하다.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활자 언어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로 설명된 미술 작품을 전부라고 믿는 순간, 작품은 은하계 너머 미지의 세계로 달아난다. 활자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어떤 이야기(narrative)를 미술은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자언어로 된 비평은 작품의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이 비평 본연의 업무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작가들마저 아이러니하게도 글(활자언어)로 설명된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 한다. 도저히 현대의 표현으로..

해석에 반대한다, 수잔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이후 수잔 손택을 알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을 통해서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인용하면서 근대 일본 문학을 이야기했다. 아마 내가 문학 이론서를 읽으면서, 최초로 감탄했던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이 아니라.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을 종종 읽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나, 작품의 결을 파악해 나가는 방식이나, 작품과는 무관하게 서술되거나 인용되는 이론들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긴 수작으로 평가받은 고진의 책이나 수잔 손택의 이 책과 비교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젊은 날의 수잔 손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

다색 빗물의 파동 - 김영민 개인전

다색 빗물의 파동 - 김영민 개인전 2009. 1. 29 - 2009. 2. 20 굿모닝신한갤러리(여의도) Untitled, 130.3X162.2cm, Mixed media on Canvas, 2008 얼마나 한참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비포장 길 한 쪽 구석, 오전에 내린 비로 얕고 작은 웅덩이 하나가 생겼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앉아, 바지 끝이 닿는지도, 소매 끝이 더러워지는 지도 모른 채, 맑게 갠 하늘이 빗물 웅덩이의 수면 위로 비친 모습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부면 그 작은 웅덩이에도 물결이 일었다. 바로 옆 미루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에 요동을 쳤고 내 작은 손가락 하나에도 흔들거렸다..

비평 2007년 봄호

'생각의 나무'에서 내는 계간지다. 얼마 전 봄이 오는 길목에 구입한 여러 권의 잡지들 중의 하나였다. 작년부터 미술잡지만 읽어오던 터에, 인문학 공부가 소홀하던 터에, 최근 인문학 트렌드도 알 겸, 요즘 필자들은 누가 있는가 구경할 겸, 구입하였다. 하지만 서문부터 읽다, 책장을 덮고 몇 달째 방치해두고 있다. "누군가가 부자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가난해진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 "누군가가 건강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더 병들게 되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식과 교육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더 무지해졌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영국의, 한때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마이클 하워드가 '더 타임즈'의 광고에 실은 16개의 강령 중 마지막 세 강령이라고 한다. 이..

문화이론입문, 그래엄 터너

문화연구입문 - 그래엄 터너 지음/한나래 문화 연구 입문그래엄 터너 지음(김연종 옮김) 한나래 이 책의 원제는 이다. 즉, 제목 그대 로 영국의 문화 연구 전통에 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고 해 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서이기 때문에, 꼼 꼼히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의 구성은 제 1부 기본 원칙들-, . 제 2 부 중심 범주-,,,. 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문화연구(혹은 문화이론)에 대한 교양강좌가 각 대학교(원)나 사설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곳에 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절대로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다면, 그건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문화연구(문화이론)'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