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75

어느 일요일의 이야기

1. 쓸쓸한 하늘 가까이 말라 휘어진 잔 가지들이 재치기를 하였다. 죽음 가까이 버티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푸른 빛을 받아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허공 가운데, 내 마음이 나부꼈다. 2. 익숙한 여행길의 낯선 파란 색이 건조한 물기에 젖어 떠올랐다 검은 빛깔의 지친 아스팔트가 습기로 물들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실룩거리는 엉덩이 위로 한 다발 꽃들이 피어나 꽃가루를 뿌렸다 붉은 색에 멈춰선 도로 위의 자동차 속에서 사내들이 내려 소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고 아직 어린 나는 공포에 떨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해 내 눈물은 강이 되어 내 육신을 싣고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떠났다. 3. 나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름 없는 주드 (Jude the Obsure), 토마스 하디

이름 없는 주드 1 -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민음사 이름 없는 주드 2 -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민음사 소년이여, 꿈 꾸지 마라.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자신이 자란 마을을, 그대의 부모와 가문을. 만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더라도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절대로 자신의 고통스런 가난을 저주하지 말며, 타인들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 것이며, 자주 견디기 힘들고 쓸쓸할 지라도 그 일상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드는 늘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미래를 향해 서 있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의 평온한 삶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일상을 꿈꾸었으며, 사촌인 수와의 사..

안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 창문을 여는 때는 주말 아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며칠 전 문득 창을 열었다. 하얀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정말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약 2 킬로미터 정도 되던 학교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로 유명한 자유로를 달렸던 것도 기억한다. 안개는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우리 마음 속 깊이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건들과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실은 안개 너머 어떤 신비의 유토피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가는 도심공항행 리무진 버스에는 안개로 인해 결항된 비행기 탓에, 승객..

슬럼프

예기치 않게 슬럼프가 왔다. 일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 반 나절 정도 못한 일을 오늘 새벽 3시간 동안 끝낼 수 있었다. 지난 금요일부터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혼란스러웠으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우울해졌다. 예전같으면 편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흐트러졌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새벽에 잠을 자기도 했으나,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7시 전후였다. 술을 과하게 마신 날도 있었으나, 취하지 않았고 실수도 없었다. 약간, 혹은 매우 쓸쓸해졌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주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는 일이 있었다.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째 척 맨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 더블 LP를 듣고 있다. 대학시절, 시를 쓰던 친구 자취방에서 듣던 그 느낌 그대로 였다. 교육..

라디오의 잡음

사라져가는 가을의 향기를 못내 아쉬워하는 듯, 비가 내렸다. 올해의 연애도 실패였고 올해의 사업도 성공이라기 보다는 실패의 빛깔에 가까웠다. 독서의 계절은 오지 않았고 작품 감상은 우아해지지 못한 채, 돈에 걸려 넘어지며, 내 감식안을 시험했다. 종일 반쯤 잠에 취해, 술에 취해, 쓸쓸함에 취해 피곤했다. 겨우 밤 늦게 정신을 차리고 설겆이와 청소를 했으나, 나를 행복하게 해줄 어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스턴트커피에 오래된 우유를 잔뜩 넣고 죽는 시늉을 했다. 라디오를 틀었으나, 잔뜩 잡음이 끼인 채, 주파수 사이를 헤매며 겨우겨우 내 귀에 도달했다. 내일 약속은 한없이 뒤로 밀려가는 듯 하고 까닭없는 내 사랑도 한없이 뒤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얼마 전 만난 어떤 이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었..

소리와 사랑

옥소리와 박철의 사건을 보면서, 한국적 상황이 빚어낸 슬픈 초상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을 지속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다. 이제 사랑은 관습의, 규범의, 제도의 규제도 벗어난 채 도전과 모험, 그리고 도피의 회오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아, 이탈로 칼비노라면 ‘보이지 않는 사랑’라고 불렀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잠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자 물음표들이 연속적으로 호수의 물결처럼, 내 마음 가장자리에 가 부딪혔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텍스트보다 사랑의 주위를 구성하는 콘텍스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차라리 모른 채 시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온라인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그 중에 ‘소리, 말..

콘텍스트 속의 midnight blue

콘텍스트가 싫다. 텍스트만의 자족적인 세계가 나는 좋다. 와토가 사랑의 정원에 머물다가 사랑의 섬으로 여행을 떠나듯, 프라고나르가 깊은 숲 속에서 남이 알지 못하는 밀애를 즐기듯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무렵, 한때 우리들의 신앙이었던 마르크스는 당당하고 비장한 어조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자본주의 이후의 신세계에 대해서 슬프지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을 무렵, 오스카 와일드는 고상한 연애짓을 해대며, 우리 삶이 예술을 닮아있다고 말했다. 콘텍스트가 싫다. 텍스트만의 자족적인 세계가 나는 좋다. 하지만 슬픈 표정의 예술가들이 끝내 그 희망을 이루지 못했듯이, 내 사랑도 그렇게 변해갈 것같아 두려웠다. 콘텍스트 속에서 ..

개인적 체험, 혹은 늙어간다는 것, 무디어져간다는 것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

여자

내가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어떤 여자. 그런데 과연 사랑하는 걸까. 눈만 감으면 생각나고 힘들 때면 생각나고 행복할 때면 생각나고 비가 올 때도 생각나도 언제가 생각나긴 하지만, 그런데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은 언제나 유리창 같아서 보기엔 투명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얇은 망치 하나로 깨지는 게 사랑인데, .. 과연 난 그녀는 사랑하는 걸까. 현실의 삶은 너무 거칠고 힘들어서, 그냥 손을 놓아버리면, 그냥 놓아버리면 속이 편할 어떤 것이어서, 그 속에서 유리창 같은 사랑을 난 지킬 수 있을까. 내 꿈은 내가 손수 잡은 갤러리에 그녀의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걸어, 내가 전시 평을 쓰고 잡지 잡아 인터뷰 하고 .. 그런게 꿈이었는데, ... 그게 가능할까. 하긴 가능은 할 꺼야. 대신 그녀가..

봄날의 문자 메시지

군대를 벗어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느새 민방위이다. 넓은 영등포 구민 회관 입구 쓰레기통에다 민방위 관련 책자를 놔두고 왔다. 강당 앞쪽에 앉아 있는데, 몇 통의 전화가 왔고 몇 개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전화와 문자메시지. 보통 때라면 오지 않았을. 바람은 너울치듯이 나무가지 앉았다가 지붕에 앉았다가 전신주에 앉았다가, 그렇게 봄을 심어놓으면서 지나가고 도시의 퀘퀘한 매연 틈 속에서 햇살은 곧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후 두 시 반.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문제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그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이 멍에가 되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 미안하구요." 낯선 전화번호. 누구일까. 누구였을까. 그리고 민방위 교육 사이 쉬는 시간, 누구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