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59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실비아 플라스(지음), 진은영(옮김), 엘리   오래 전에 사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읽다 그만 둔 채 서가에서 먼지만 먹고 있는데, 나는 최근에 실비아 플라스의 유고 시집인 >을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젊었을 때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스러움이 언어들 속에서 묻어나와, 시인 테드 휴즈를 미워하게 되었다.  시집에서 세 편을 옮긴다. 최고의 시는 역시 다. 영어로 읽기를 권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번역은 한 단어 한 단어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시인 진은영의 번역이 상당히 좋긴 하지만.  불모의 여인 텅 비어 있어, 나는 가장 작은 밠소리에도 울린다. 기둥들, 주랑 주랑 현과들, 둥근 천장..

때 늦은 우울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울 뻔했다. 20대 시절엔 자주 있던 일이었지만, 나이가 들어선 그런 경우가 없었는데 말이다. 그 땐 정말 해 지는 오후만 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눈물을 참으려고 술을 마셨다. 내 나쁜 술버릇은, 변명처럼 그렇게 만들어졌다. 장석남의 시를 좋아했는데, 술에 취하면 다들 그렇듯 기형도의 을 소리내어 읽었다. 조금 나이가 들자, 허수경의 을 읽었다. 킥킥거리며, 당신, 당신 그렇게 부르며 울었다.  시 따위 쓰지 않은 지 오래 되었고, 소설에 등장할 만한 사람들이 내 꿈에, 혹은 마음 깊은 곳에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는 때도 가끔 있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서교동 성당 안으로 한 소녀의 뒷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이 참혹스러울 때가 있을 뿐이다.    새벽..

나와 마주하는 시간, 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라이너 쿤체(지음), 전영애, 박세인(옮김), 봄날의 책    오랜만에 쿤체의 시를 읽었다. 실은 잘 모르겠다. 몇 편의 시를 옮겨적긴 했으나, 노(老)시인의 독일어는 한국어로 옮겨져 나에게까지 왔으나, 그 거리는 꽤 멀게 느껴졌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 검은 날개 달고 날아갔다, 빨간 까치밥 열매잎들에게 남은 날들은 헤아려져 있다. 인류는 이메일을 쓰고 나는 말을 찾고 있다, 더는 모르겠다는 말,없다는 것만 알 뿐   아니면 내 문제인가. 나에게 이제 시(詩)는 너무 멀리 있는 건가.    사물들이 말이 되던 때 내 유년의 곡식 밭에서밀은 여전히 밀이고, 호밀은 여전히 호밀이던 때,  추수를 끝낸 빈 밭에서나는 주웠다 어머니와 함께 이삭을 그리고 낱말들을 낱말들은 까끄라기가 짧기도..

가을 감기와 르네 샤르

르네 샤르(Rene Char, 1907 - 1988). 번역서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가 읽었던 많은 프랑스 문인들이 한결같이 애정을 표시했던 시인은 르네 샤르였다. 시에 대한 번역은 반역일 지 모르나, 여러 개의 번역들 중 하나의 번역일테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기에 걸렸다. 아이가 먼저 A형 독감에 걸리고, 내가 이어 걸렸다. 하루는 전철을 타고 나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 이후 몇 주가 지났으나, 목은 계속 아픈 느낌이다. 한 번 그렇게 아프고 나니, 체력 회복이 쉽지 않다. 휴식이 필요한데, 밀려드는 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연말까진 이 모드일 듯하여, 걱정이다. 먼저 커피부터 줄여야 하는데, 오래된 습관을 바꾸기란 닥치지 않은 공포와 마주하는 듯하여, 쉽지 않..

관측, 이영주

관측 이영주 지구의 중력이 인간의 피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피는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에 잔뜩 힘주고 서 있는 것이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나. 렌즈 안으로 푸른 숲이 번진다. 수은이 빛나는 의자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랑 상관없이 노래를 불러도 되지?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헤어지는 노래를 사랑을 담아 부른다. 뜨끈하고 이상하고 끈끈해. 새벽에 걸어 들어온 수목림 내가 걷는 숲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피가 물들어 있다. 망원경에 입김이 피어오른다. 물큰하게 젖은 잎들이 흔들린다. 자꾸만 이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지구에서 흐르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너의 혈액 때문이었나. 붉게 물든 발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인가. 크..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는다.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원문이 더 좋다. 시어는 확실히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지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가 가지는 세계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익혀야 된다. 그 언어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 올리버는 확실히 생태주의적이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 아름다운 장소들로의 여행에 대하여 나는 아직도 날마다 신을 찾아다니고 아직도 도처에서 신을 발견하지, 먼지 속에서, 꽃밭에서, 물론 바다에서, 저 멀리 누워있는 섬에서, 얼음의 대륙들, 모래의 나라들, 모두가 저마다의 청조물들과 신을 갖고 있지, 어떤 이름으로든 주머니에 아직 백 년쯤 넣고서 배..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Braver at night 앤 섹스턴Anne Sexton(지음), 정은귀(옮김), 민음사 앤 섹스턴 시집을 읽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버티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 내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1960년대 미국 여류 시인이 무엇과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할까. 더블 이미지 Double Image (...) 너를 기쁨이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너를 조이스라 이름 지은 걸 나는 기억해 강보에 푹 싸인 채 축축하고 이상하게, 너는 내 무거운 가슴에 어색한 손님처럼 왔어. 나는 네가 필요했어. 나는 남자애를 원하지 않았어. 여자아이만을, 이미 사랑받고 있는, ..

내가 사랑한 것들은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지음), 포르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그만 두고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이의 시선집이다. 아마 자신에게 인상깊었던, 그래서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시들을 모아, 시마다 짧은 에세이를 붙여 만든 책이다. 시를 읽고 싶은 이들에게, 그러나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참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두 세 번 읽어도 된다. 이런 책은 참 부담없다. 아무렇게 읽어도 된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더 좋다. 나는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술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좋았다. 요즘 시인이 누가 있는지, 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해 이 책을 읽었는데,..

일요일 출근

출근을 했다. 평일에는 전화, 회의, 출장 등으로 정신이 없으니, 주말에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그렇다고 엄청 여유로운 것도 아니어서 쫓기는 듯한 기분은 어쩔 수 없구나. 다들 이런 걸까. 아니면 나만 이런 걸까. 적당히 쓸쓸하다. 기분 좋은 쓸쓸함이랄까. 그냥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런, 그리운, 하지만 슬픈 감정이랄까.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엘 들려 시집 구경이나 해야 겠다. 그것으로 사소한 위안으로 삼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