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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 창문을 여는 때는 주말 아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며칠 전 문득 창을 열었다. 하얀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정말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약 2 킬로미터 정도 되던 학교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로 유명한 자유로를 달렸던 것도 기억한다. 안개는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우리 마음 속 깊이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건들과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실은 안개 너머 어떤 신비의 유토피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가는 도심공항행 리무진 버스에는 안개로 인해 결항된 비행기 탓에, 승객..

꽃 52

눈발 날리는 날이면 기억 나는 시 한 편이 있다. 늘 생각날 뿐, 외우진 못한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가 사랑하던 춤과 그림, 음악은 그의 글 속에 남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젠 서점에서 구할 수도 없을 시집을 서가에서 꺼내 헛기침 한 두 번 한 후, 소리 내어 읽어본다. 그러자 내리던 눈은 그치고 하늘은 어느 새 겨울 태양의 빛으로 가득 찬다. 내 희망은 보잘 것 없고 내 사랑은 늘 부주의하게 걷다, 길가 돌부리에 넘어져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모차르트와 오래된 시가 아닐까. 꽃 52 김영태 (1936~2007) 차의 시동을 걸면 성에 낀 유리가 맑아진다 마음은 반대로 어두워지고 희끗희끗 눈발이 날려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고 있다 못 견디게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3월의 어슴푸레 번지는 저녁의 물컹한 검정이 손가락 끝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이 검게 물든다. 오래된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허기에 찬 만년필처럼. 34년 살아온 나와 하루하루 일과에 치여 순간순간 변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은하 사이처럼 멀기만 하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시집을 펼쳐 활자와 활자 사이에 숨어있는 시인의 마음을 잡아낸다. 다행히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시인이 된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받을 일인가. 그러니 웃고 즐거워하고 마냥 행복해야 할 것이 시인의 운명이거늘, 예전의 그나 지금의 그나 그렇질 못하니, 그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으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

창작수업

시 창작 수업이다. 5월. 1층 강의실 옆 잔디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대낮부터 막걸리와 소주를 펼쳐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 의례 술잔 옆에는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이 나뒹굴고. 강의를 하러 들어온 교수는, 출석을 부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술판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이 수업을 들어와야할 학생들이 있음을 발견하곤 한심한 눈으로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쳐다본다. 이 좋은 봄날에 자네들은 강의실에서 뭐하는 짓인가. 자네들은 시를 쓸 수 없겠구만. 하곤 2시간 강의를 꼬박 채우고 창 밖 학생들의 술자리로 간다. 강의실에 앉아 있던 몇 명의 학생들도 투덜대면서 술자리로 간다. 그렇게 어느 대학 봄날 오후가 지나간다. ----------- 생각해보면, 대학 2학년 때, 군대 가기 전 낮술이 정말..

바다와 나비, 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시집이 있었다. 가끔 꺼내 읽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빌려준 그 이는 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한 밤 중에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작은 소리로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