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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가 맨, 장정일

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나는 그게 지겨웠어.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

물, 프랑시스 퐁주

물 프랑시스 퐁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역: 김화영)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에 읽는 이름. 프랑시스 퐁주. 물에 대한 시다. 물은 ..

눈,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

게으른 달력, 하기와라 사쿠타로

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죽은 전원시 지금 이 시간에 내 안데스의 사랑하는 동심초와 앵두 같은 리타는 뭘 하고 있을까;비잔티움은 날 질식시키고내 몸속엔 풀어진 코냑 같은 피가 잠을 청하는데. 하얀 오후에 속죄의 자세로 옷을 다리던그녀의 손들은 어디에 있을까;지금 비가, 내 삶의 의욕을 앗아가는 비가,가없이 내리는데. 그녀의 플란넬 치마랑 무슨 상관일까;그녀의 열망; 그녀의 걸음새;달콤한 사탕수수에 바친 노동. 문에 기대어 황혼 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겠지.마침내 떨며: "이런 ...... 오늘은 정말 춥구나!"한 마리 야생의 새도 울겠지, 기왓장 위에서. - 세자르 바예호 지음, 구광렬 옮김 세자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시다. 20세기 남미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 독자에겐 생소하다. 나도 십수년 그의 이름..

노산군(魯山君), 자규시(子規詩)

오규원의 (문학동네, 1996년 초판)을 꺼내 읽는다. 그리고 늘 생각나는 시 한 편을 옮긴다. 우리에게는 단종으로 알려진, 노산군이 17세 지은 시(詩)다. 원통한 새가 되어서 제궁을 나오니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하늘도 저 애끓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노산군(魯山君), , 1457년. 17세의 사내가 지은 시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1996년 이 시를 읽고 한참 울었다. 문득 이 시를 읽으며, 그 때의 상념에 젖는다. 이 시를 짝사랑하던 여대생에게 보내주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모한 짓이었구나. 시인 오규원 선생님이 ..

'스페인 1937', W.H.오든(Auden) - 2015년을 향한 詩

"but to-day the struggle."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 구절이라는 생각에 한글로 옮겼다. 역시 영시는 한글로 옮길 수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뜻을 통하게 옮길 수 있지만, 영어 고유의 맛을 옮길 순 없었다. 옮긴다면 아예 새로 창작한다는 기분으로 옮겨야 하고, 이럴 땐 번역이 아니다. 아는 지 모르겠지만, 스페인은 20세기 대부분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시대였고, 20세기 초반 무수한 유럽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Brigadas Internacionales)'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소설가이자 프랑스 초대 문화부 장관인 앙드레 말로도 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오든(W.H.Auden)은 구구절절하게 스페인 내전 참전을 독려하는 시를 적었는데, 바로 아래 라는 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 시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어느덧 내 영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