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꿈꾸며, 삭히며... - 심보선의 시집

나이가 들자, 철이 들자, 결혼 생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집은 내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먼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동안 육지 생활만 했다. 거친 흙바람 사이로, 붕붕 거리는 검은 자동차들 사이로, 수직성의 공학적 규율로 세워진 빌딩들 사이로, 거대한 거짓말로 세워진 정치적 일상 속에서 시는 없었고 시집은 죽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름이 왔다, 갔다. 외로움이 낙엽이 되고 흙이 되고, 몇 해의 시간이 지나자 사랑이 되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먼 바다로 나갔던 시집은 지친 기색도 없이 이름 모를 바다 해변가로 밀려들었고 그제서야 나는 육지 생활에서 한 숨 돌릴 수 있는 무모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집을 샀다, 놓았다, 펼쳤다. 심보선은 2011년의 대세다. 몇 년이 지난 그의 시집을 서가에서 ..

오징어뼈, 에우제니오 몬탈레

출근길에 시집 한 권을 챙겨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읽는 건 너무 낯설어서, 꺼내지도 못했다. 이는 사무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집을 읽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로만 했다. 어쩌면 모든 시는 위기의식으로 만들어지듯, 모든 시 읽기는 현대적 공간에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시를 읽는 나는 물신적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21세기 현대적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 같았다. 한 때 내 모든 것이었던 시는 이제 시 읽기조차도 어색해진 상황이 되었으니, … 그런 내가 들고 나온 시집은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오징어뼈’였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의 시는 번득이는 슬픈 유머와 깊은 통찰, 그리고 나와 너, 자연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서..

사물들에 대한 사랑, 혹은 숨겨진 외로움

하루의 피로가 몰려드는 저녁 시간. 밖에는 3월을 증오하는 1월의 눈이 내리고 대륙에서 불어온 바람은 막 새 잎새를 틔우려는 가녀린 나무 가지에 앉아 연신 몸을 흔들고 ... 어수선한 세상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고, 밀려드는 업무에 잠시 손을 놓고 ...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 오는 3월의 어느 저녁.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사물들에게 바치는 송가 모든 사물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들이 정열적이거나 달콤한 향내가 나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이 대양은 당신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추들과 바퀴들과 조그마한 잊혀진 보물들. 부챗살 위에 달린 깃털 사랑은 그 만발한 꽃들을 흩뿌린다. 유리잔들, 나이프들 가위들… 이들 모두는 손잡이나 표면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스쳐..

한 잎의 여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도 작품) 일을 하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오규원의 오래된 시가 눈을 환하..

저주받은 성, 파블로 네루다.

저주받은 城 파블로 네루다 지금 (추원훈 옮김) 내가 걷고 있는 동안 보도블럭은 내 다리를 두들겨 패고 있고, 별들의 찬란한 빛은 내 눈을 부숴뜨리고 있다. 창백한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 자욱을 남기고 비틀거리며 가는 마차에서 밀알이 떨어지듯 갑작스레 내게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오오 누구도 결코 챙겨 놓지 않은 길 잃은 생각들, 말이 내뱉어졌다면, 느낌은 내부에 남아있는 법. 여물지 않은 이삭, 악마는 그것을 공간에서 발견할 테지, 나는 망가진 눈으로 그걸 찾으려 들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리라. 나는 망가진 눈을 하고 끝없는 길을 쉬임없이 간다… … 왜 생각의 길을, 왜 헛된 삶의 길을? 바이올린이 부서지면 음악이 죽어 버리듯 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할 때면 내 노래도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내 가슴 깊은 ..

광고판이 붙은 버스, 최승호

아침에 일어나 서재 정리를 하면서 방바닥에 뒹구는 시집 한 권을 펼쳐 들어, 몇 편 읽었다. 최승호의 1991년도 시집이다. 이 때 시집 가격은 2,500원. 하긴 그 때 학교 앞 식당에서 김치볶음밥 가격이 1,8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한 끼 굶고 시집을 샀다. 요즘엔 새 시집을 거의 사지도, 읽지도 않지만. 확실히 현대란, 서사시의 시대이지, 서정시의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대 문학을 보면 서사시도, 서정시도 드물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포스트모더니즘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불투명하고 모호해진 현대 세계 때문일까. 최승호의 ‘세속도시의 즐거움’(세계사, 1991년)에 실린 시다. 마치 정권 바뀐 후의 우리 일상을 보여주는 듯해, 마음이 아리다. 광고판이 붙은 버스 운전사..

허난설헌, 김성남(지음)

허난설헌 - 김성남 지음/동문선 많은 기대를 하고 펼친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완성도는 너무 떨어졌다. 여기저기 쓴 논문들을 수정없이 모은 듯 보이는 이 책은 똑같은 내용이 책에 앞에 등장하기도 하고 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엔 책의 내용까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처음에는 규방시인이 아니었다고 하다가, 뒤에는 규방시인 허난설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난설헌의 천재성이나 독창성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 허균의 누이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면서, 유선시(遊仙詩)의 대가였다. 그녀는 시간와 공간을 잘못 타고 태어났으며, 그래서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신선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박복한 운명의 주인공이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었다. ..

안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 창문을 여는 때는 주말 아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며칠 전 문득 창을 열었다. 하얀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정말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약 2 킬로미터 정도 되던 학교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로 유명한 자유로를 달렸던 것도 기억한다. 안개는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우리 마음 속 깊이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건들과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실은 안개 너머 어떤 신비의 유토피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가는 도심공항행 리무진 버스에는 안개로 인해 결항된 비행기 탓에, 승객..

꽃 52

눈발 날리는 날이면 기억 나는 시 한 편이 있다. 늘 생각날 뿐, 외우진 못한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가 사랑하던 춤과 그림, 음악은 그의 글 속에 남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젠 서점에서 구할 수도 없을 시집을 서가에서 꺼내 헛기침 한 두 번 한 후, 소리 내어 읽어본다. 그러자 내리던 눈은 그치고 하늘은 어느 새 겨울 태양의 빛으로 가득 찬다. 내 희망은 보잘 것 없고 내 사랑은 늘 부주의하게 걷다, 길가 돌부리에 넘어져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모차르트와 오래된 시가 아닐까. 꽃 52 김영태 (1936~2007) 차의 시동을 걸면 성에 낀 유리가 맑아진다 마음은 반대로 어두워지고 희끗희끗 눈발이 날려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고 있다 못 견디게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3월의 어슴푸레 번지는 저녁의 물컹한 검정이 손가락 끝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이 검게 물든다. 오래된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허기에 찬 만년필처럼. 34년 살아온 나와 하루하루 일과에 치여 순간순간 변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은하 사이처럼 멀기만 하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시집을 펼쳐 활자와 활자 사이에 숨어있는 시인의 마음을 잡아낸다. 다행히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시인이 된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받을 일인가. 그러니 웃고 즐거워하고 마냥 행복해야 할 것이 시인의 운명이거늘, 예전의 그나 지금의 그나 그렇질 못하니, 그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으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