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2

내 마음의 건축 - 하, 나카무라 요시후미

내 마음의 건축 - 하 -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일요일 아침, 조심스럽게 일어나 서재로 와서 밀린 독서를 하였습니다. 독서가 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제 독서는 가족의 즐거운 일상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취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내에겐 이런저런 수다를 할 남편이 필요하고 이제 겨우 백일이 되어가는 아이에겐 눈을 마주칠 아빠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제 독서란 아주 이기적인 것이지요. 하지만 습관은 어쩌지 못하는 탓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아내와 아이를 방해하지 않고 일어나는 조심스러움이 일요일 아침의 키폰인트인 셈입니다.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이 책은 블로그 이웃이신 하늘바다 님께서 추천해주셨습니다. 이 책은 상권, 하권, 이렇게 두 권으로 나왔는..

우기(雨期)의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발리에 다녀왔다. 올해 초 내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이 변화는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고 새로운 미래와 도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변화에 대해선 길게 정리하고 싶어, 반은 사적이고 반은 공적인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대신 사진 두 장을 올린다. 아열대의 숲을 보고, 나는 아비정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비정전을 숨죽여 보던 시기로부터 17년이 지났다. 삶의 태도와 보이지 않는 생각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무언가를 찾아 나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인 셈이다. 이틀 동안 머물렀던 빌라의 한 장면이다. 풀장 깊이가 약 1.5미터나 되었고 수시로 다람쥐들이 놀러왔다.

사진 정리 중 - 파리 풍경

사진 정리를 거의 못하고 있었다. 급한 일 하나를 끝내고 사진 정리를 한다.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다.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흔들, 흔들 거린다. 갤러리 프레드릭 모아상의 입구. 17세에 지어진 건물 1층에 자리잡은 갤러리다. 갤러리 입구에서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의 풍경. 비가 왔다. 차창으로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키고 찰칵.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힘들 때마다 꺼내드는 책들이 있었다.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에 출판된 임화의 시집, 게오르그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그러고 보니, 이 책들 모두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힘들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여하튼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어쩌면 힘들다고 할 때의 그 이유가 다소 달라진 탓일 게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보냈던 20대엔 대부분의 고초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30대의 고초는 경제적이거나 업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 파리로 가서, 다다음 주 초엔 터키 이스탄불로, 다시 그 다음 주엔 파리로, 그리고 그 주말에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

2008년 독일 아트.칼스루헤 - 2

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요리를 본다. 꼭 이국의 젊은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눌 듯한 느낌이다. 포크로 조심스럽게 하나를 찍어 먹는다. 창 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비가 내린다. 한 나라의 요리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 천박한 허기는 낯선 요리를 깊게 음미할 기회를 여지없이 박탈해버린다. 마치 대부분의 소년들이 가진 거칠고 사나운 욕정이 순결한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들에게 상처를 내듯이(아니면 그 반대든지). 낯선 요리에 반한다는 것은 이국의 대기와 대지 속에 온 몸의 감각을 맡기는 것과 같다. 독일 요리는 순박하다. 화려한 기교나 장식은 없다. 낯선 이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수줍은 듯 말을 건네다가, 상대의 호의를 느끼는 순간 편한 미소로 다가온다. 독일의 요리는 이런 모습으로 우리 ..

2008년 독일 아트. 칼스루헤 - 1

해마다 겨울이면 조용하고 은밀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것은 곱고 차가운 햇살 아래에서 다듬어지며, 창 밖의 불길한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흰 눈으로 감추어진다. 가끔 깊고 무거운 막다른 골목길까지 걸어 들어오는 행인의 구두 밑에서 사각대는 눈 소리는 내 사각의 방이 가진 쓸쓸한 온기를 터질 듯 한 컷 부풀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전, 서울엔 눈이 내렸다. 그것이 내가 올해 본 마지막 눈이었다. 곧바로 Art. Karlsruhe가 열리는 Messe Karlsruhe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중이었고, 유럽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이미 와서, 전날 항공화물로 도착한 작품들을 꺼내 놓고 작품을 전시장 벽에 설치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작품을 설치하다가 미리 예약해놓은 호텔로 갔다. ..

갈색 먼지의 목감기

갈색 먼지로 뒤범벅이 된 레코드자켓에서 타다만 낙엽 끄트머리 색깔과 닮은 레코드를 꺼내 일본의 어느 전자 공장에서 나온 지 족히 20년은 넘긴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낡은 목소리들이다. 그 목소리들 사이로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던 그 때 그 시절의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다. 하긴 그 때나 지금이나 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혼은 변한 건 별로 없는데. 그러나, 결정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영혼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어제 낮에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오늘 오전까지 계속 돌아가고 있다. 잠시 세탁기로 흘러나오던 물이 끊어진 탓이다. 그리고 나는 세탁기의 삶은 존중해주기로 마음 먹은 적은 없지만, 대신 내 삶의 피곤에 지쳐 금방..

자전거여행, 김훈

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2000 김 훈의 문장은 그 서정성의 깊이로, 그리고 그 문장의 우아함으로 언제나 여러 평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뒷 표지에 실린 정끝별의 글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오버'다. 늘 소설이나 시집, 혹은 산문집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평은 작가들의 영혼을 비켜나가선 스타카토 풍의, 뚝뚝 끊어지는 문장의 공허함만을 선사한다. 이번도 틀리지 않아서 '가히 엄결하고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든 가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 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라는 문장은 을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글쓴이가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가끔 몇 권의 책을 언급하지만 그건 잠시..

여행

가끔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토요일 오후 일찍 강릉으로 향했다. 대관령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향 강릉에 내려가 지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경포에 갔다. 바다는 조용했다. 말 없는 세상이 싫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는 듯. 하지만 세상은 다 알지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불구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솔직히 그렇게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친구의 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다음 날 아침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 강릉 안목에서 먹은 문어는 정말 별미였다. 오늘 오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꾸었다. 꿈을 꾸려고 노력했다...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지음), 정영목(옮김), 이레 첫 페이지는 좋았지만, 채 열 페이지를 읽지 못한 채 덮었다. 초반부를 띄엄띄엄 읽다가 중반 이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여행에 대한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는다거나, 대단한 여행 기술이나, 2006년 겨울 서울의 직장인들에게 대단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알랭 드 보통이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부러웠으며 여행지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읽어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부러웠으며 정처 없이 생각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부러워했다. 나는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같이 가지도 않을 뿐더러, 그나마 간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