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23

파리에 왔다.

파리에 왔다.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전시 준비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 여유가 많지 않고 비상식적으로 올라간 환율 때문에 계획했던 일 몇 가지를 못할 것같다. 그리고 예정에 있었던 이스탄불 방문은 다음 기회로. 파리의 여러 미술관과 FIAC를 방문하고 돌아올 예정이다. 미래는 계속 유예되고 있는 느낌이다. 파리라는 도시의 모습보다 파리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이 파리의 매력을 이끄는 힘인 듯 싶다. 비좁은 카페에서 길을 지나는 행인들과 아래로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그들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담배를 피운다. 거리는 온통 담배 꽁초들로 가득하고 거리는 차로 밀린다. 오래 전에 파리로 유학 왔더라면, 후회하지 않았을 듯 싶다. 르 클레지오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고 한다. 조금 늦은 감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힘들 때마다 꺼내드는 책들이 있었다.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에 출판된 임화의 시집, 게오르그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그러고 보니, 이 책들 모두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힘들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여하튼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어쩌면 힘들다고 할 때의 그 이유가 다소 달라진 탓일 게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보냈던 20대엔 대부분의 고초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30대의 고초는 경제적이거나 업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 파리로 가서, 다다음 주 초엔 터키 이스탄불로, 다시 그 다음 주엔 파리로, 그리고 그 주말에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

여름 밤의 공포

창을 열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두텁고 축축한 서른다섯 사내의 불쾌한 냄새를 치우려고 해보지만, 바람이 밀려들어 오는 것도 잠깐, 뒤 따라 들어온 빗방울들은 먼지가 쌓인 책상 귀퉁이를 적시고, 체모가 뒹구는 방바닥을 적시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을 덮치고 내 발은, 내 손은 금세 젖어버린다. 나무로 된 케이스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갈라진 캔우드 리시버 앰프의 불륨을 조절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풍의 피아노 음악 소리 사이로 비가 지상의 여러 구조물과 만나 부서지고 흐르는 소리를 엿듣는다. 그 소리 속에 이 여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어떤 비결이라도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해 보지만, 삐친 애인의 숨소리 마냥, 그 비결을 눈치 채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주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