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14

흉터와 무늬, 최영미

흉터와 무늬 -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이경림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 이경림 지음/이룸 파란 하늘이 위로, 약 이십킬로미터 정도 끝없는 우주 쪽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조금 넓어진, 또는 매우 넓어진 하늘을 메우기 위해 공기들이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며 바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마다 삼월 초면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하늘이 먼저 움직이고 뒤따라 공기들이 움직였다. 옷깃 사이로 공기들이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갔다. 꼭 파도 같았다. 방 구석 오래된 책장 속에서 '정원'을 페이지 속에 숨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숨긴 정원의 크기를 가늠할 방법은 없었지만 내가 책을 들고 흔들자, 우수수 작은 나무며, 푸른 잔디며, 둥글고 맨들맨들한 돌맹이들이 떨어져내렸다. 꼭 한겨울 함박눈처럼 내려 금새 방을 가득채웠고 열린 창을 넘어 골목길을 채우기 시작했다. ..

칼의 노래, 김훈

칼의 노래 -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김훈(지음), , 생각의 나무 내 몸 속에, 내 가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소설의 짧고 단단한 문장들 틈 속에서 소리죽여 울어야만했다. 하지만 죽여야할 것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몸 속, 내 가슴 속에서 날 공격했고, 소설 속 화자인 이순신이 죽여간 왜며, 부하며, 조선포로며, 전과를 말해주기 위해 짤려져, 소금에 절여진 머리통 위로 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로 젖는구나 젊은 왜가 칼에 새겨놓은 저 글귀는 이내 내 영혼을 파고들고, 나를 버려도 내 육체를 버리지못함이 한없이 슬프고 내 몸짓들의 까닭없는 부정들이 날 공포 속으로 밀어붙인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새, 하일지

하일지(지음), , 민음사, 1999. 과연 우리들은 우리들의 바램대로 행동하고 말하는가? 오늘날의 우리들은 고작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할 뿐이다. 그리고 이 욕망(믿고 싶어함)은 거대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현대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냐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건 새로운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 거짓된 행복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며 최면을 걸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의 키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 의미가 거짓이며 자기기만이더라도 우리들은 키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적어도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