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빠른 독서(讀書)와 느린 독서

지하련 2009. 10. 11. 12:58


빠른 독서(讀書)와 느린 독서



반복과 속도

혹시 ‘포드주의(Fordism)’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 적용한 노동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컨베이어벨트 양 옆으로 노동자를 배치하고 생산 과정을 분업화시켜, 각 노동자가 동일한 업무만을 반복하여 해당 업무 처리 속도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을 뜻한다. 그 당시 한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려면, 한 곳에서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헨리 포드가 이를 혁신한 것이다. 경영의 관점에서는 ‘혁신’(innovation)이지만,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자의 비인격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이와 관련된 영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자동차에 대해선 딱 한 부분(또는 몇 부분)만 전문적으로 알 뿐, 나머지 부분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반복된 작업은 결과적으로 빠른 속도를 낸다는 것이다. 이는 독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빠른 속도만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는다. 내 책 읽기의 시작은 소설이었으나, 지금은 책이라는 건 다 읽는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정기적으로 읽는 잡지만 봐도 그렇다. 르몽드 디플로마크 한글판(월간), 동아비즈니스리뷰(반월간), 미술잡지(월간 - 월간미술, 아트인컬쳐, 미술세계 중 택일), 주간지 한 종, 그 외 계간지 두서너 종을 읽는다. 일간 신문은 다 읽는 것이니, 빼둔다. 여기에다 이메일 뉴스레터도 읽으니, 일주일에 읽는 페이지수로만 보자면 족히 백 페이지를 넘긴다. 여기에 일 주일에 책도 한 권 이상 읽으니, 일주일에 오백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책도 잡지와 비슷하여,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이라면 무조건 손을 댄다.)

하지만 나는 직장인이고 퇴근 후에는 약속 있는 날이 많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는가 궁금해 한다.

책 읽기의 방법

대학시절 내가 책 읽는 방법은 단순했다. 무슨 책이든 책 옆에 무조건 빈 노트를 두고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잡지를 읽다가, 신문을 읽다가 기억해두어야 할 단어나 문장이 나오면 어김없이 적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리뷰(감상문)를 썼다. 방식이 이러니, 일반적인 독서보다 2배 이상 느렸다.

내 책 읽기의 시작은 2배 이상 느린 독서였다. 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책을 읽고 싶다. 이미 경험적으로 나는 빠른 독서는 좋은 책 읽기가 아님을 안다. 속독(速讀)은 좋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학부모가 있다면, 절대로 아이에게 ‘속독법’을 가르치지 말기를. 단어 하나하나와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는 느리고 신중한 독서가 깊은 생각, 좋은 글의 시작이다.

내가 책을 옆에 두고 살아온 지도 20년이 넘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는 뒷전이었고 책이나 잡지 읽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는 대학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 자주 책을 읽다가 이미 읽었던 단어나 문장이 종종 만나게 된다. 익숙해진 것이다. 요즘같이 가로쓰기에, 큰 활자에, 심지어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가는 베스트셀러 실용서 같은 것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은 이런 책이 아니다. 반대로 나에게 긴 시간을 요구하며, 문장을 기억하길 강요하고, 한 페이지를 함부로 넘기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교과서’라고 불리는 개론서들이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빠른 독서를 원한다면, 먼저 개론서(두툼한 책)를 느리게 읽기를 바란다.

개론서와 잡지

어느 특정 분야의 책을 빨리 읽기를 원한다면, 먼저 읽기 어려운 책을 집어 들고 오랜 시간 동안 읽어야 한다. 옆에 노트까지 해가며. 이를 통해 특정한 단어나 문구, 또한 문장이나 표현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마 한 권을 읽는데, 몇 주나 몇 달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친 후, 이 분야에 대한 다른 책을 읽을 때는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독서가 반복되면 될수록 책 읽기의 속도는 빨라진다. 아는 부분이 나올 때는 띄어 넘고 읽을 수도 있게 된다.

잡지 읽기도 권한다. 손쉽게 단편적인 정보를 얻기에는 전문 잡지만한 것도 없다. 이 점에서 한국은 매우 열악한 잡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잡지의 종류도 얼마 되지 않고 그 잡지의 수준도 낮기 일쑤다. 잡지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단편적인 정보를 축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정보들은 책을 읽을 때, 책의 흥미를 높일 수 있다. 종종 아는 정보를 만나게 해주며, 몰입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또한 새로운 정보를 빨리 접하게 해준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책 읽기의 양이 아니라 책 읽기의 질이 핵심

내가 싫어하는 책 중의 하나가 장정일의 ‘독서읽기’이다. 나는 일 권만 읽고 이후는 읽지 않았으나, 내 기억으로는 그 이후 여러 권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책이 좋았다거나 나빴다 정도만 반복적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책이 자신의 세계관이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혹은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책의 가치나 영향력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는 다독가이기는 하지만, 그는 마치 잡지 읽듯이 책을 읽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이 가진 진정한 가치나 내용을 알기 전에 장정일은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책을 얼마나 많이, 빨리 읽는가를 자랑하는 듯 읽혔다.

종종 나는 이런 비유를 든다. 십 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보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더 깊고 명징한 사유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문제는 십 만 권의 책과 백 권의 책이 서로 다른 종류이며, 서로 다른 책 읽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빠른 책 읽기로, 건성건성 읽는다면, 그 책의 진가를 알지 못할 것이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그 책들이 한결같이 쉽게 읽히는 대중 소설이나 실용서라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울 지 모르나,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빠른 책 읽기(速讀)란 없다

공병호의 책 읽기는 책 좋아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빠른 책 읽기란 없다고 적긴 했지만, 정보 취득이 목적인 독서일 경우엔 가능할 것이다. 이는 필요한 정보만 읽고 나머지는 버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도 두툼한 책들을 읽은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이라곤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이제 책을 읽기는 해야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실용적인 독서를 해야겠다고 필요한 곳만 읽고선 책 다 읽었다고 버린다면, 황당하다고 할 수 밖에.

힘들어도 느리게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작은 활자에, 두툼한 책을 읽어야 된다. 그림 하나 없는 책부터 읽어야 된다. 이렇게 읽지 않고 빠른 책 읽기로 넘어간다면, 책이란 없고 깊이 있는 생각이나 통찰은 기대할 수 없다. 하긴 가벼움이 넘쳐나는 시대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