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텅빈 주말의 사소한 희망

지하련 2019. 2. 12. 12:06




설 연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리뷰를 쓰지 못했기에). 젤딘의 <<인생의 발견>>과 바라트 아난드의 <<콘텐츠의 미래>>. 그리고 한 권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렘브란트>>를, 억지로 다 읽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생의 발견>>과 <<콘텐츠의 미래>>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오랜만에 트래백(trackback)을 해볼까 했더니, 네이버 블로그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아난드는 콘텐츠의 미래는 '연결관계connection'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와 함께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전복과 산낙지를 샀다. 며칠 전부터 전복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간 것인데, 살아있는 낙지를 보더니, 그것도 먹고 싶다고. 결국 전복과 산낙지를 사와 집에서 산낙지부터 회로 준비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자르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거의 먹지 못했고, 결국 남은 것은 라면에 넣어 먹었다. 


연초부터 일이 많았다. 야근을 밥 먹듯 했고 술자리도 있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꿈을 가지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내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사라질 기미마저 없다). 시간만 나면 뭔가를 꿈꾼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랑에 대한 꿈까지도. 


이 세상은 위계적 질서의 반영(doctrine of analogy)이라고 플라톤, 그리고 이후의 철학자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플로티누스와 중세 철학자들이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만, 가끔 그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랬으면 나는,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꿈을 꾸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소한 가능성 앞에서도 흥분하지 않았을 텐데(어쩌면 근대는 인간에게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바로크의 꿈이기도 했다. 나, 근대적 자아/주체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으리라는 바로크의 꿈 말이다).


짐멜은 플라톤 철학을 연극적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저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배우들이고. 다른 말로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인 셈이다.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는 아예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이라는 작품을 짓기도 했지만. 이 연극의 극본은 일종의 설계도, 형상(eidos)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연극배우였던 어떤 이가 말하길 자신은 연극무대가 끝났을 때 한없이 슬퍼더라고 ... 연극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직선적 세계관이다. 신은 그 직선의 시작과 끝에 서있고 이를 동시에 바라본다. 그래서 이 세계가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작년 연말에 갔던 강원도 어느 강변 산책가 나무 계단 속에 네 잎을 가진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연히 보고 사진을 찍었다. 나이가 드니, 사소한 것 하나에 마음이 설렌다. 아니면 마음이 설레고 싶은 것이다. 마음 설렐 일이 너무 드물어진 탓일까. 아, 대학시절땐 길 가던 긴머리 소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만 지어주어도 설레었는데(지금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하고 걱정부터 먼저 한다)


올 한 해 가슴 설레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잠시 그런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