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혼술과 커피에 대한 실존적 고찰

지하련 2019. 2. 27. 12:56


매일 아침 저녁, 또는 시간 날 때마다 일기를 쓴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냥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과 종교적 기원을 적는다. 오늘 하루가 어떤 일들로 구성되었는지 적지 않는다. 그걸 적으려고 보니, 너무 길어질 것같기도 하고 그럴 정신적 에너지도 남지 않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은 나이다. 앞으로 그 비율은 더 심해질 것이다. 딱히 지혜나 통찰을 가지지도 못했고, 그나마 있던 지식이나 상식도 얇게 스쳐가는 바람에 휘익 쓸려 날아가고 있는 늦겨울, 혹은 초봄이다. 


낯선 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젊은 이들과 술을 마시거나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감수성이 무뎌지거나 슬픔이 덜 하거나 쓸쓸함이나 고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외면할 뿐. 


다시 말해, 생에 대한 스킬(Skill)이 늘어난다. 

일종의 편법이자, 회피이면서 도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외면이다. (결국 나쁜 것이다!)


이와 비례하여 늘어난 것이 혼술이다. (술의 주량이 줄어드는 비극적 상황 앞에서) 



애처로운 풍경이다. 술은 교류를 위한 것이자, 서로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방법이며,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류도, 이해도, 사랑도 없는 자리에 덩그런히 홀로 놓여진 술병은 참 애처롭기만 하구나. 


하지만 커피는 고독을 위한 것이다. 뜨거운 물이 곱게 갈려진 커피 알갱이 사이로 내려가면서 근처를 매끄럽게 환기시키는 향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주 짧은 순간 희열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은 커피는 같이 마실 수 있으나, 술을 같이 마시는 건 금기시하기도 한다)  



술을 즐기지만, 이젠 이건 그저 혼자만의 취미가 되었고, 커피는 애초부터 혼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였던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마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짐작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사회 속에서 결국 마주하게 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장 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강조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결국 남는 건 나, 즉 실존적 자아 뿐임을.


키에르케고르에서 이 실존적 자아는 '이것, 아니면 저것' 앞에서 선택의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햄릿의 절규과도 같은, 어떤 결단. 


그 앞에서 나는 한껏 혼자 술을 마시며, 커피를 내리며, 인생에 대한 스킬을 뽐내며, 스스로를 외면한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건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이긴 자들은 늘 자신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상 대부분의 이들은 지는 자들이며, 이름 없는 이들이며, 보잘 것 없이 죽어갈 것이다.  

(심지어 유명한 이들도 역사의 패배자가 된다.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처럼)


그러니, 오늘도 나는 술을 마시고 커피를 내리며, 홀로 음악을 들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혹은 앞으로 그럴 것처럼.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마치 스물두살 청년처럼,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어하지만, 에너지도 없고 여유마저도 사라져가고, 그저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