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도 많이 달라졌지만 독자층의 책읽기 버릇도 영 딴판이다. 세로 읽기가 가로 읽기로 바뀌고, 한자나 한자말보다 한글과 토박이말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판을 다시 짜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선 괄호에 묶인 한자를 다 없애버렸다. 낱말은 귀로만 들어서도 얼른 뜻이 잡혀야지, 눈으로 글자를 확인해야만 짐작이 간대서야 말이 안된다는 생각에서이다. - 박은수, '개역판을 내면서', <<발레리선집>>, 을유문화사
행이 세로로 편집된 책이 있는가 찾아봤더니, 딱 한 권 남아 있었다. 나 또한 가로 읽기 세대여서, 가끔 절판된 책들 중에 세로로 편집된 것들을 구해 읽었던 몇 번이 전부다. 변화 속에서 있으면 그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마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이듯, 변화도 우리와 하나이다. 우리가 변하고, 변화는 우리로부터 만들어진다. 단계를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미 쌓여있는 것들을 우리가 우리의 방식으로 깨닫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겐 한자와 세로 읽기는 참으로 낯선 것일텐데. 그런 시대가 있었다고 말하는 나도 낯설다.
새벽에 읽어나 박은수의 <<발레리선집>>을 꺼내 펼쳤다. 이젠 폴 발레리를 읽는 사람도 드물어졌고, 그의 시집 정도가 꾸준히 번역될 뿐이다. 그의 시도 좋지만, 발레리가 후대의 평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방대한 그의 산문들 때문인데, 한국에서는 소개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선 발레리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은 발레리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있어야 하며, 철학이나 사상사,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야만 발레리의 산문을 온전히 습득해 한글로 옮길 수 있을 테니까. 실은 불어나 영어로 된 발레리 해설서라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 번 찾아볼까)
아이의 사춘기가 심해진다. 갑작스레 변한 아이를 보면서, 내가 겪었던 그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의 성장이 꽤 힘들어보며 마음이 아팠다. 매일 엄마와 싸우는 전쟁터다. 최소한 기본적인 것만을 지킬 수 있도록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가 서른을 넘겨서까지 힘들었던 무수한 심리적, 정신적 고난, 방황들을 떠올려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란 존재가 기적일 지도 모른다. 무수한 우연들로 겹쳐진. (르 클레지오는 어느 소설에선가 그것이 기적이라고 하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