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했다. 이제 아이는 핸드폰의 지배를 받는다. 핸드폰을 많이 한 날과 그렇지 않는 날의 태도나 반응은 현저히 다르다. 사춘기가 왔지만, 사춘기보다는 핸드폰의 영향이 더 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난감하다. 사춘기 자녀가 있는 모든 집의 문제다. 모든 집의 문제인데, 그 누구도 정책적 해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핸드폰을 활용한 수업을 학교에서 할 지경이다. 가령 동영상 제작 수업이나...
아이가 방학을 했다. 매일 전쟁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과 고민은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의 해결이 핸드폰이면 안 된다. 세상이 너무 변했다. Digital Natives라고? Digital Addiction의 다른 말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에게 마시멜로 효과라든가 핸드폰을 많이 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중요하지 않거나 개선의 효과가 없다. 하긴 '아이'의 개념도 발명된 것이니, 이 세상은 애초에 '아이(어린이)'를 위한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라면 아이가 겪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려깊게 바라며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습게도 그건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직 대학 진학에만 목을 맨다. 참 형편 없는 나라다. 하긴 형편 없는 국민들이 와글와글 사는 나라니, 그럴 만도... (지금 이 나라에서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라.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옛날 같으면 언론에서 난리가 났을 상황이다.)
문과를 없애야 한다. 이과 통합이 아니라 문과를 없애야 되는 거다. 이제 철학은 이론물리학자나 수학자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수로 만들어진 어떤 존재가 가지는 지고한 가치다. 아니면 수로 해석가능한 존재의 가치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이며, 우리의 뇌에선 끊임없이 양자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는 수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불가해하다. 아이도 하나의 우주다. 불가해하다. 하루에도 수십차례 양자도약을 한다. 새로운 인과율이다. 너무 황당하고 난처해서 이해하려다가 웃거나 포기하게 된다. 파스칼이 말한 '저 끝없는 우주의 영원한 침묵'을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불가해한 존재라는 걸 알까. 그래서 신비롭고 찬란하다는 걸 알까. 저 무한한 우주를 닮았다는 걸 알까. 그런 아이와 저녁을 먹으러 가는 늦은 오후,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다. 저 무지개 너머 무엇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이젠 우습겠지.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인가. 하긴 어느 학자는 1950년대에만 해도 유럽 시골 골짜기에선 중세적 삶을 살았다고 적고 있다. 하긴 이 한반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리산 골짜기에는 화전민이 살고 있었으니까.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 그 변화 앞에서, 그 변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르고 좋은 것인지, 내일을 밝게 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