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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푸른숲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푸른숲 600페이지를 다 읽기 위해 독자가 부담해야할 몫은 적다. 그저 로자가 걸어갔던 길을 뒤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길이라 낯설지만, 진실 되고 신념에 가득찬 길이라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 옆에서 막스 갈로는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세상은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인데. 그러나 그러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진실은 언제나 너무 늦게 대중들에게 도착하게 되고(때때로 영원히 도착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그건 마치 진실을 적은 편지 한 통을 집어넣고 밀봉한 병을 대양의 한 가운데에 던져 누군가에게 발견되기 기다리는 것과 유사하게..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 로린 마젤(Lorin Maazel)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72년도에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자켓의 LP. 그리고 로린 마젤이 지휘하고 Pilar Lorengar, Dietrich Fischer Dieskau, Giacomo Aragall이 주연한 La Traviata. 오늘 종일 집에서 혼자, 몇 주 전 슈퍼에서 사온 다진 마늘을 잔뜩 집어넣은 라면 하나, 오늘 근처 슈퍼에서 사온 포장 냉면. Decca에서 나온 두 개의 낡은 LP 앨범. 오늘 하루 그냥 지나가버린다. 텅빈 영혼 속으로 밀려드는 한 여름 밤의 낮고 축축한 더위. 내일이 가고. 내일이 가고.

비디오 테잎

겨울 창원. 새벽 3시. 불꺼진 지하 비디오 대여점. 카운터에 앉아 비디오들을 카피했다. 그 때 많은 사연을 만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열린 시네마떼크에 나가기도 했고 새로 생긴 잡지의 모니터 기자도 했고 슬픈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 새벽이면 단란주점에서 삼촌을 하던 친구와 술을 마셨고 다른 단란주점에 나가던 여자아이와 나이트를 놀러가기도 했다. 그 때 왕가위, 키에롭스키, 데 시카, 장 뤽 고다르, 브레송, 테렌스 멜릭, ... ... 이십대 초반이었으니... 꽤나 심각하던 나이였다. 그 때 처음 재즈를 만났다. 덱스트 고든을 좋아했었다. 그 지하 비디오 대여점에서 복사해놓은 테잎들을 이제서야 정리한다. 돌이켜보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 무척 피곤했다. 일은 많고 도망칠 수 없고 ..

키노

키노가 폐간한다. 폐간호 하나를 구입했다. 창간호와 폐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 전 일이다. 창간호를 산 것도. 창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은 키노 모니터 기자에 응모하기도 했다. 그 땐 멋 부린다고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꼭 나이트 웨이터같은 '이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정성일 투가 좋아 키노 모니터 기자들 잡지가 나왔을 때, 그 투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키노를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는데, 이유는 말이 되지도 않는 글들 때문이었다. 아무 상관관계도 없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심각하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너무 심각해지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선했지만, 지적인 독자를 잡지 못하는, 지적 허영에 가득..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열림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 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98쪽 글쎄, 이 소설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며 선뜻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까. 한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 회고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프랑스 어느 작은 지방 도시 이야기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는 이질적인 느낌만을 더할 뿐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산뜻하고 사뿐했다. 그러니 글쓰..

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열린책들 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열린 책들 이야기는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로 오빠를 찾아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도시는 정말 ‘폐허’였다. 그 풍경은 먼 미래, 무시무시한 핵전쟁 이후 무정부상태를 묘사하곤 하는 SF 영화들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개인(안나 블룸)에게만 그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녀의 실존적 환경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SF 장르 영화의 서사구조와는 틀리다. 그렇다고해서 장르 영화와 얼마나 틀릴 수 있을까. 끝까지 달성 가능한 희망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1) 소설은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에 들어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는,..

내 머리 속의 휘익.휘익.

몇 주 만인가. 아니 몇 달 만인가. 토요일 오후, 내 사각의 방에 앉아 청승을 떨어본 것이. 다행히 ‘낙타과음’이라는 글 속에서 시인 김수영이 ‘어쨌든 근 두 달 동안이나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얻긴 했지만.1) 술잔가에 맺힌 물방울 모양이 계속 머리 속을 휘익휘익 밀려다니는 걸 보면 꽤나 나도 술에 쩔어있었구나. 종일 라면 두 개와 초코파이 두 개로 보내고 에머슨레이크앤팔머의 세라비와 조용필 베스트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방바닥을 뒹군다. 요즘은 오래된 우리나라 노래가 좋다. 나이가 든 탓일까. 오래 전에 재미없게 읽었던 김수영의 산문이 오늘 재미있게 읽히는 것도 그렇고 정종 생각이 나는 것도 그렇고. 창 밖에선 어느 남자가 술에 취해 장인에게, 변명 반, 싸움 반으로 뭐라고 하는 소리가..

세잔

세잔 Cezanne 창해ABC북 모더니즘을 새로운 형태의 고전주의라고 지칭하는 까닭에는 폴 세잔과 같은 예술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인상주의 사이에서 시작해 위대한 고전적 양식으로 귀결되는 그의 예술 세계는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미술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조화이다”라고 생각했고 ‘회화에서 추구하는 진실은 현실에 대한 일루젼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확신에 이르는 작업’이라고 믿었다. Table, Napkin, and Fruit (Un coin de table) 1895-1900 (150 Kb); Oil on canvas, 47 x 56 cm (18 1/4 x 22 in);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

사양, 다자이 오사무

사양(斜陽)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소화. 둘이서 소리 내어 웃었지만, 웃고 나서 한없이 쓸쓸해졌다 - 25쪽 책을 읽다 졸음이 왔다. 휴대용 커피 한 봉지를 뜯어 탄 흐릿한 빛깔의 커피 한 잔을 마시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오래된 독일산 듀얼 턴테이블에 척 맨지오니의 레코드판을 걸어두고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으면서 졸음을 느꼈다. 그리고 잠을 잤다. 일요일 오후 몇 주째 엉망인 사각의 방 구석에서 선풍기 바람 속에서 낮잠을 잤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밖으로 블랙 커피 빛깔로 변해 있었고 다시 사양을 펼치면서 지는 해 사이에 서있는 가즈코를 생각했다. 스물 아홉의 가즈코. 지금 일본 열도 어느 구석에선 장차 문학을 하리라 꿈꾸는 짧은 머리의 청년이 배낭을 싸고난 다음 지도를 꺼내 간단하..

다섯 번째 계절

서양의 기후 학자는 korea의 계절을 다섯 개로 나누고 그 속에 장마(우기)를 집어넣는다. 장마 속에서, 잠시 비를 그친 도시의 도로는 한적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바람은 낮고 낮은만큼 하늘도 낮고 구름도 낮고 그녀의 시선도 낮았다. 어느 새 점심식사 대용으로 가져다 놓은 머그 잔 속의 까페라떼는 허연 자신의 가슴 바닥을 들어내고 정오의 고요 속으로 몸을 묻는다. 어느 검색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은 에릭 사티의 짐노패디를 들으면서 그간 슬프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너무 슬프게 살아왔었다. 두 달 정도 충격 속에 빠져 지내왔다. 부모님의 결혼에 대한 강요는 견디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사랑은 없지만 결혼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면 결혼도 바뀌는데, 시스템 속에 있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