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801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민음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p.7 하지만 한나는 죽는다. 그녀의 사랑하던 힘이 죽고 그녀의 기억들이 죽고 그녀의 꿈들이 죽는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사랑과 모든 기억들로부터 떠남으로써 그녀는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슬픈 죽음의 날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검은 날개가 눈에 익다.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그녀의 검은 날개. 때때로 증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들을 인생의 고통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꼭 ‘넌 날 사랑하니’라는, 그 어떤 대답으로도 채워지지 ..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양장) -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열린책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기엔 너무 끔찍스러운 이 소설은 영웅주의와 유미주의가 뒤섞인 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자기 파괴로 일관되어 있다. 그르누이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르누이적 세계-냄새로만 자기 정체성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바로 신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소설의 시작부터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인으로서의,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속한다...

황홀한 밤, 스티븐 밀하우저

, 스티븐 밀하우저 Steven Millhauser, 1999.(윤희기 옮김, 아침나라, 2000) 짧고 서정적인 문장. 하지만 소설의 첫 장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면 어느 여름 밤의 풍경을 병렬적으로 나열해놓았을 뿐, 어떤 스토리나 사연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의 합창 이 밤은 계시의 밤. 인형들이 깨우는 밤. 다락방 몽상가의 밤. 숲에서 피리 부는 자의 밤. (11쪽) 문장 하나 하나는 간결하고 깊다. 영어로 된 원작을 읽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설이 가져야하는 미덕을 이 소설은 갖추지 못했으니 선뜻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열린책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지음), 열린책들 우리 시대는 근대 개인주의의 어떤 극점에 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설가가 바로 폴 오스터이다. 그는 어떤 인도주의나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들에 심한 경멸감을 내비치면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한 순간도 냉정을 잃지 않으며 감정의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차가우며 어떤 점에선 매우 매력적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이것은 과연 미덕인가, 악덕인가. 는 폴 오스터의 자서전 비슷한 것이지만, 꼭 자서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가 알겠는가. 허구일지. 따지고 보면 진실에 기반..

윤리와 무한, 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Ethique et Infini』 엠마누엘 레비나스와 필립 네모와의 대화, 양명수 역, 다산글방. 2000 분명 앞으로 펴쳐질 100년 동안 윤리, 또는 윤리학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사유가 '존재'에서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허무로 휩싸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퍽퍽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부정되기 시작했으며 존재가 부정되기 시작하는 순간 '생의 허무(vanitas)'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존재의 철학들(이 말이 가능하다면!)은 대학 강단에서, 먼지로 뒤덮인 책 속에서 걸어나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갈 것이다. 레비나스는 그 철학들의 우두머리격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몇몇 명징한 말들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하..

예술사를 통해서본 여자

1. 오래 전에 번역되어 많이 읽히지도 못하고 사라진 소설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은 있을 것이다. 빠스깔 레네의 .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하층 계급의 여자와 상류층의 남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하층 계급의 여자, 뽐므라는 이름을 가졌고 투명한 영혼을 지닌, 그녀가 거리를 걸어가면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어떤 매력을 지닌 여자와 파리 고문서 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파리 박물관 관장이 될, 미래에 대한 야망과 꿈을 가진, 에므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서로 메워줄 수 없는 어떤 거리를 꼬집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에므리의 편이 아니라 뽐므의 편을 들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뽐므는 여자..

새, 하일지

하일지(지음), , 민음사, 1999. 과연 우리들은 우리들의 바램대로 행동하고 말하는가? 오늘날의 우리들은 고작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할 뿐이다. 그리고 이 욕망(믿고 싶어함)은 거대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현대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냐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건 새로운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 거짓된 행복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며 최면을 걸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의 키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 의미가 거짓이며 자기기만이더라도 우리들은 키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적어도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새'는 ..

2000년: 새로운 세계 속으로

1. 2000년 서울, 그리고 우리 오늘날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시드니 올림픽을 볼 수 있다. 어느 순간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움직이는 곳마다 감시장치가 있고 주인공은 그 감시를 한 순간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두고 '음모이론(Conspiracy Theory)'이라며 몇몇 사람들은 떠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런 끔찍한 세계는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IMT2000(IMT2000 International Mobile Telecommunication 2000)이라고 해서 국가간 무선통신 서비스, 화상통신서비스 등을 위한 단일 주파수, 단일 기술 표준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그러면 핸드폰마다 ..

엿보기의 비밀

1. 얼마 전 ***의 포르노가 돌았을 때, 우리 시대가 불순한 관음증으로 도배된 사회라는 것을 또다시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정말 우리 시대의 잘못일까? 노출증과 관음증. 이 단어는 후대의 역사가나 예술사가들이 우리 시대를 정의 내릴 때 사용하게 될 몇 안 되는 단어들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프 쿤스는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증 환자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Dirty - Jeff on Top, 1991 Jeff Koons. 제프 쿤스는 대담하게, 그리고 매우 친절하게 자신의 성행위를 보여준다. 이 대담한 예술가는 왜 사람들이 타인의 성행위에 관심을 가지는가에 대해 반문하면서 미술관 전체를 한 권의 포르노 잡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과연 내 성행위..

백과전서, 마들렌 피노

, 마들렌 피노 지음. 한길 크세주 5권 이 책은 전적으로 라는 방대한 책의 서지적 사항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사나 사상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백과전서파’라는 단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혹은 내가 ‘백과전서파’에 대해 필요치 않은 중요함을 부여하고 있을 수도 있다. 17권의 본문책들과 11권의 도판책으로 이루어진 는 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달랑베르는 서문에서 ‘우리가 시작한(그리고 완성하기를 원하는) 이 저서는 두 목표를 갖는다. 이 저서는 백과사전처럼 인간 지식의 질서와 맥락을 가능한 한 설명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 공예에 관한 이론적 사건처럼 이 저서는 인문적인 것이든 기술적인 것이든 각각의 학문과 기술에 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