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17

슈가 맨, 장정일

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나는 그게 지겨웠어.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

벚꽃과 술

몇 개의 글 소재, 혹은 주제를 떠올렸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했지만, 가끔 글도 참 못 쓰고, 지적 성실성도 지적 통찰도 없는 이들이 교수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럴 여유가 존재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동한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쓸쓸한 개인만 남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금 한국엔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서른 초반에 했고 자본주의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나를 마흔 초반에 발견했다. 쓸쓸하다. 벚꽃은 어김없이 봄이면 핀다. 벚꽃이 머리 ..

몇 장의 사진, 그리고 지나간 청춘

요즘 페북과 인스타그램에 빠져 블로그짓에 뜸하다.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인스타그램을 한다면, 내 아이디는 yongsup이다. 요즘은 먹스타그램으로 빠지긴 했지만. 퇴근길, 나이가 들었다. 조금 있으면 사십 중반이 될 텐데, 스스로 아직 청춘인 줄 안다. 밤 11시, 술 생각이 나는 건, 오늘 때문일까, 아니면 내일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들 때문일까.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질문들은 줄지 않고 믿었던 답들마저 사라진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참 맛없는 치킨 옆의 맥주가 안타까웠다. 참 맛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대박을 꿈꾸긴 않았지만, 적어도 여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서울, 한국을 사로잡은 21세 자본주의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엉망으로 된 전 회사..

책, 그 살아 있는 역사, 마틴 라이언스(지음)

책, 그 살아 있는 역사 마틴 라이언스(지음), 서지원(옮김), 21세기북스 책이 없었더라면 서구 역사의 위대한 전환기적 사건이 과연 가능했을까?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 그리고 계몽주의 모두 활자의 힘을 빌려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지난 2500여 년동안 인류는 필사본 혹은 인쇄본 형태의 책을 이용해 자료를 기록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신을 숭배하고, 후대를 교육했다. (7쪽) 책의 시작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시대순으로 배열한 이 책은 풍부한 도판과 저자의 흥미진진한 설명으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나오자 마자, 금서와 검열의 역사도 같이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저자들보다 ..

헝가리 식당, 이영주

헝가리 식당 이영주 헝가리 식당에 앉아 있다. 내 목을 만져보면서. 침묵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 ... 이런 기후는 맛없이 천천히 간다.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아름다운 철창 밑에 있다.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있다 보면 감각은 끔찍해진다. 수염까지 붉게 물든 남자는 접시에 혀를 대고 있다. 오도카니 앉아서. 철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식당. 맛없는 내가 앉아서 오래된 폐허를 헤집으며 속을 파고 있을 때. 무섭고 겁이 날 때. 수염 달린 남자는 창문을 연다. 향수병에 걸린 감각은 바람 따라 흐른다. 웅웅웅 울림소리를 낸다. 동쪽은 은신처가 아니지. 수염 사이로 붉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많이 다쳤을 때는 밥을 먹어야지,..

내 마음의 건축 - 상권, 나카무라 요시후미

내 마음의 건축 - 상 -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정통 현대건축의 금욕적인 표현에 건축가들이 이제 더는 주눅들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수한 것'보다는 이것저것 뒤섞인 혼성품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보다는 적절히 타협한 것이, '쉽고 단순한' 것보다는 한 번 비튼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 것보다는 애매한 것이, (... ...)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보다는 관습적인 평범한 것이,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혁신적이면서도 남겨진 흔적을 지닌 것이, 직접적이고 명쾌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불분명한 것이 좋다. 나는 명확한 통일감보다는 너저분해도 생동감 있는 것을 중시한다. 나는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이중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나는 의미가 명료한 것보다는 의미..

책향기 맡기Smelling the Books는 가슴 떨리는 첫 키스

In Omnibus requei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photograph by Michael Schmelling http://www.eyeheartbrains.org/index.php?/project/smelling-the-books/ 올해 29살인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한다. 뉴욕의 MoMa 도서관(The Museum of Modern Art Library). 2010년 초 그녀의 이 아름다운 프로젝트 ‘Smelling the Books’는 시작되었다. 책들로 빼곡한 서가, 창 밖 햇살이..

예술의 우주 2011.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