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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젖은 구두 벗어 ...

지하철에서 내리자 마자 비가 와락!! 다 젖었다. .. 그리고 이문재의 시집이 떠올랐다. 오늘 해가 뜰려나. 오후는 내내 외근인데..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 문재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월요일 아침

혼자 있을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니 말이다. 주말 집 근처 공원을 산책했고 늦봄 꽃 향기에 취했다. 그 향긋한 내음 사이로 아이는 웃고 뛰었다. 그리고 월요일이다. 주말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다시 월요일을 시작한다. 지난 금요일에 면접을 봤던 웹 개발자는 출근하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문자에 대해 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꽤 상심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된다. 혼자 고민해야 될 문제는 아니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만 신경 쓰기도 바쁜데 말이지. 다시 월요일이다. 그리고 비가 온다. 비를 맞으며 출근 했다. 팻 메쓰니의 음반을 뮤직 사이트에서 찾아보았으나, 없다. 비오는 날, 나는 팻 메쓰니의 New Chaut..

에너지와 레드불

커피를 두 번이나 내려 마시곤 결국 레드불을 사서 먹는다. 온 몸이 카페인화되고 심장 박동수는 빨라지고 피부가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집중력 향상은 적응되지 않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도리어 산만해지고 말았다. 회사를 옮기고 나는 자주 밤샘을 하고 있다. 주로 고객사에 Web Strategy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Contents를 어떻게 창조하여 보여줄 것인지, User Interface나 User Experience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Technology를 사용할 것인가를 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고객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인데, 그러다보니, 매번 제안서마다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에 대한 가치를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은..

담배 피우는 우리들의 피터팬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금연 캠페인 홍보물이다. 하나는 백설공주가 나쁜 마녀한테서 사과 대신 담배를 건네 받는 그림이고 하나는 피터팬이 담배를 피우다 할아버지가 된 그림이다. 그런데 피터팬 그림은 이래저래 심금을 울린다. 그건 담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안 좋아졌으면 피터팬으로 하여금 담배를 피우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다가 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피터팬에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었고 늙지 않는다는 피터팬도 천천히 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담배를 피우면서 신세한탄조의 표정으로 물끄러미 먼 산을 쳐다본다. 그러고 보면 힘든 세상, 벗이 되는 건 술과 담배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 너무 위험한 생각인가. 크) - 2005년 8월 19일 토요일 아침 커..

철길 위의 평화스러운 침묵

잠시 철길 너머 맞은 산등성이를 바라 보았다. 낮게 내려온 흰 구름은 금방까지 내렸던 굵은 빗줄기를 알려주고 있었다. 창원에 내려갔다 왔다. 주말에 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오고 난 뒤, 제사라고 해서 내려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토요일 아침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나는 멈춰 있고, 주위의 모든 것들은 변하는 것 같다. 에고이스트여서 그런 걸까. 아내는 시댁 분위기에 한결 적응한 모습이었고, 어머니께선 며느리가 마음에 드시는 듯하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고 여동생 내외가 간밤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드디어 나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에 동참했다. 그 이야기 사이로 언어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아찔아찔..

미지의 칠월

어두컴컴한 하늘 너머, 마치 어떤 이가 황금빛 바가지 가득 물을 담아 아래로 붓는 듯, 세차게 긴 비가 내렸다. 2011년, 미지의 칠월이다. 끝없이 모래의 대지가 펼쳐진 서남아시아에서 넘어와, 어떤 우여곡절 끝에 검고 딱딱하게 변한 아스팔트는 단단했고 중국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져 서울까지 운반된 우산은 튼튼했다. 방송통신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공부란 늘 그렇듯 끊김 없는 시간과 여유로운 집중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장인 내가 이것이라도 하고 있음이리라.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과연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다.) 세차게 비가 내렸다. 남청 색 신발이 빗물에 젖었다. 빗소리에 가려, 차소리, 걸음소리, 숨소리, ..

책상 위 화분

내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최초는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고 몇 번은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 없는 식물이 침묵과 쓸쓸함 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 한 켠에 화분을 놓아두고 그 옆엔 낡은, 자신의 노년을 겨우 지탱해나가는 캔우드 리시버 앰프를 놓아두었다. 화분은 소란스럽고 건조한 사무실을 잘 견디었고, 오래된 캔우드 리시버 앰프는 몇 명의 주인을 거쳐간 다음, 나에게 왔지만, 가끔 자신의 처지를 슬프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늘은 화분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얇게 내리는 비와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속에 놓아 두었다. 비와 바람은 옛날 이야기를 내 귀에 속삭였지만, 모던 사회에..

어느 일기

1. 화요일이었나, 아니면 월요일이었나... 봄비가 내리는 서울역 맞은편 카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어수선한 거리 분위기와 달리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 밖 우산의 색이 밝고 화사하게 보여, 불투명한 우리 삶과는 대비되어 보이는 오후였다. 지난 십년 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꼈던 삼십대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그건 내 주업이 아니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지만, 그것도 이젠 주업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 가치 있는, 특히 예술계에세 기여할 수 있는 어떤 사업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긴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나,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 느낌이 들..

4월 중순, 비가 내리자 대륙 깊은 사막 먼지 냄새가 났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본 지도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로드 무비Road Movie의 대명사였으며, 롱 테이크의 교과서와도 같은 장면들이 나온다. 이 영화의 OST는 컬렉터의 표적이 된 음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영화 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작 오래된 영화나 뒤져 다시 보는 정도다. 회사에 남아 일을 하는 월요일 밤. 내일 중요한 고객사와의 미팅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 ... 올해 초 한 번 다운된 기분은 쉽게 상승하지 못하고 있다. 벌써 몇 달째 이르는 듯 싶다. 이번 주중엔 하루 정도 휴가를 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와야 겠다. 나스타샤 킨스키도 이제 40대인가. 아니면 50대인가. ... ... 젊음이 사라지는 자리에 삶의 안락이 깃들어야 하는데, 그러기가 참 어려..

안경

어렸을 때, 안경을 끼고 있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 눈이 나빠졌다는 듯이, 그들 대부분은 반장이거나 부반장이었다. 안경과 은밀한 비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뭔가 있어보인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억지로 눈을 나쁘게 만들기로 했다. 내 최초의, 자기 파괴적인 경향의 나쁜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때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다행스럽게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오년이 지난 후, 나는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다. 깨알 같은 글자의 소설책들(세로쓰기로 된 책들까지)과 음란한 영상을 보여주는 심야의 유선 방송 탓이였다. 안경, 내 몸의 연장 늘 몸에 붙어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익숙해져버린 낯선 물체. 내 두 눈이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동안엔 언제나 눈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