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40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 회고록

지난 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지음), 이미애(옮김), 민음사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는다. 그녀의 >을, ... 고등학교 때 읽은 후, 산문집 몇 편을 읽었을 뿐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도하고 있지만, 겨우 읽은 게 이 짧은 회고록이다. 회고록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고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 왜 다 죽는 걸까.   인생이 우리가 계속 채워 가는 그릇이라면, 그렇다면 내 그릇은 의심할 바 없이 이 기억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에서 세인트아이브스의 아이 방 침대에 누워 파도가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며 해변에 밀려오고 노란 블라인드 뒤에서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바람이 블라인드를 휘날리며 바닥의 작은 도토리를 끌..

말하는 보르헤스, 루이스 호르헤 보르헤스

말하는 보르헤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송병선(옮김), 민음사  Scipta manet, verba volant 입에서 나온 말에는 날개가 있지만, 글로 쓰인 말은 그대로 있다. - 12쪽  꾸준히 보르헤스를 읽는다. 보르헤스를 만나는 동안, 무척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 주제에서 저 단어로 옮겨다니다. 영국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독일 철학자를 꺼내고 다시 고전 그리스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문학을 이야기하다가 동시대 아르헨티나 작가를 꺼내기도 한다. 이런 여행은 보르헤스만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    영국의 전형적인 스타일은 '적은 말수', 즉 사물에 대해 조금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익스피어는 과장이라는 은유법을 즐겨 사용하던 작가입니다. (20쪽) 전혀 영국스..

마르그리트 뒤라스

"만약 우리가 글을 쓰고 싶다면 그건 절망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 스스로 중요한 모순을 잊어버린다면, 또 끊임없이 이 모순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어요. 한낱 이야기꾼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순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이함에서 오는 역겨움만 있을 뿐이지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 알랭 비르통들레의 > 중에서)

도서관, 서재, ...

직장을 나가 첫 월급을 받으면 내가 사고 싶었던 책과 음반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공부보다는 원하는 책과 음반에 꽂혀 직장 생활을 하던 형을 알고 지낸 적이 있었다. 방 한 쪽 벽면 전체가 LP와 CD로 채워져 있고, 그 옆으로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이 놓여 있었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 원할 때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자유가 더 나아보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 때 꿈이 있었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굳게 스스로에게 말하는 그런 꿈. 그리고 나 또한 한 때 꿈이 있었던 사람이 되었고, 어쩌다가 나도 책을 사고 음반을 사고 있지만,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지어 그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마저... 그래서 누군가의 서재를 보면 참 부럽다. 정말 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를 그리워할 것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그는 나에게 현대소설을 가르쳐 주었다. 소설론 수업이 아니라 쿤데라의 소설이!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형편없는 문학강사들과 평론가들은 하일지의 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들이 왜 로브-그리예나 미셸 뷔토르를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늘 밀란 쿤데라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궁금했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는, 안타깝게도 체코에서는 조국을 버리고 떠난 이방인일 뿐이었다. 의 보후밀 흐라발이 체코에 남아 그 곳에서 싸우며 글을 쓴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토니 주트는 20세기를 회고한 책에서 그의 체코 친구들은 밀란 쿤데라가 서방에서 인정받고 인기가 많은 것에 대..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지음), 송태욱(옮김), 뮤진트리 어쩌다 보니 언제나 옆에 두고 읽는 작가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십수년 전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도 오에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는다.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면서 나아가 세계적인 소재나 주제까지도 이야기하며 소설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실은 오에 겐자부로가 왜 정치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정부 인사처럼 보일 듯 싶다. 가끔 일본 지식인 사회가 일본 정치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건..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최근 새삼스럽게 뒤라스를 다시 읽으면서,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라스를 찾아 읽는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뒤라스를 읽지 않았던 사이, 낯선 그녀의 책들이 번역되어져 있었고, 아직도 뒤라스를 이야기하고 있음에 감동했다. 사람을 만나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던 시절이 이제 언제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지만(그 때가 그립다. 뒤라스를 이야기하며 사랑에 빠졌던). 올리비아 랭와 데버라 리비의 글에서 만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책에서의 뒤라스와 겹친다. 올리비아 랭에게 뒤라스는 (과격하게) 술을 좋아했던 예술가 뒤라스였다면, 데버라 리비에게서 뒤라스는 남다른 통찰을 보여준 여성 작가였다. 연기는 텍스트가 가진 것을 오히려 덜어 낼 뿐, 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Deborah Levy

알고 싶지 않은 것들 Things I Don't Want To Know 데버라 리비Deborah Levy(지음), 이예원(옮김), 플레이타임 내가 Deborah Levy에 대한 글을 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번역되지 않고 그녀의 에세이만 나와있는 건 다소 의아스럽다. 그러나 어쩌면 누군가가 소설을 번역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동시대 외국 소설에 대한 독자층은 상당히 얇은 것일지도. 몇 편의 에세이가 담긴, 이 짧은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20세기 이후 본격화된 여성 예술가들의 존재는 현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존 예술사에선 보기 드문 목소리, 태도, 시각, 표현 방식을 선사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고, 잘못된 방향으..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Especes d'espaces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지음), 김호영(옮김), 문학동네 공간에 대한 산문집이다.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페렉의 스타일이 있다 보니. 하지만 이 책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다. 충분히 즐길 만하니까.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처럼 해안을 항구의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27쪽) 페렉은 공간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그 공간들 하나하나 설명하며 자신의..

아무도 아닌, 황정은

아무도 아닌 황정은, 문학동네, 2016년 읽으면서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세상은 소설가 황정은이 그리는 세상보다 더 끔찍하지 않은가. 언젠가 김서령의 소설집을 이야기하면서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다 죽는다며 불평을 했다. 황정은의 이 소설집이 그런 식은 아니지만, 김서령의 소설들보다 더 끔찍하고 어둡다는 기분이 드는 건 황정은 특유의 문장 때문이리라(아니면 저 변하지 않는 세상 때문일지도). 무미건조하고 애정이 없는 문체(문장), 툭툭 던지듯이 서술되지만, 그 밑으로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숨어 흘러간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오래된 지하수처럼 무겁고 차가우며 얼음장 같은 냉기와 함께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그 안타까운 간절함마저 이야기 속에서 얼어 독자의 발 앞에 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