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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술은 참 오래된 벗.

어떤 술은 참 오래된 벗.에라주리즈 에스테이트 까베르네쇼비뇽. 이 가격대(1만원 ~ 2만원 사이)에서 가장 탁월한 밸런스를 보여준다고 할까. 가벼운 듯 하면서도 까쇼 특유의 향이 물씬 풍기는 와인. 이 와인을 즐겨 마신 지도 벌써 10년. 그 사이는 나는 이 와인을 참 많은 사람들과 마셨구나. 아직 만나는 사람도 있고 연락이 끊어진 이도 있고. ... 흐린 하늘의 춘천을, 사용하지도 않을 우산을 챙겨들고 갔다 돌아온 토요일 저녁, ... 한없이 슬픈 OST를 들으며 ... 참 오랜만에 혼자 술을 마신다. 오마르 카이얌도 이랬을까. 인생은 뭔지 모르지만, 술 맛은 알겠다고...

안경, 그리고 술자리

"내일이 지구의 종말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술자리가 모든 존재들과의 추억을 나누는 자리였으면, 이 한 잔의 술은 보다 아름다울 거예요."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 술자리. 아니, 모든 술자리에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술자리마다 화해하고, 포옹하며, 미안해하며, 실은 사랑했노라고 고백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내 상상 속에서. 그렇게 취해간다. 안경을 바꾸었다. 바꿀만한 사정이 있었고, 그 사정 속에서 안경은 바뀌었다. 아주 어렸을 때, 80년대 초반, 안경 쓴 아이들이 멋있어 보이는 바람에, 몇 명은 의도적으로 눈을 나쁘게 하는 행위를 했고 나도 그 부류에 속했다. 형편없는 유년기의 모험은 독서에 파묻힌 사춘기 시절 동안 자연스레 안경 렌즈를 두껍게 하였다. 그렇게 사라져간다. 마음 속에서,..

2011년 연말을 장식한 2개의 와인 - Chateau de Goelane, Lou's No 1

작년 연말 전직장 부서 회식 때 마셨던 와인이다. 그런데 올해 중순에 회사를 옮겼고 옮기자 마자 준비하던 일련의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탓에 연말 분위기는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너무 황당해서 과연 이 나라의 국민들은 도대체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가 의아스러울 정도이니, 나도 드디어 (이런저런 이유로) 심각하게 '외국 나가 살기'를 진지하게 고민한 첫 번째 해가 될 것이다. 이런 분위기일 수록 더욱더 생각나는 디오니소스의 유혹. 하지만 최근 들어 자주 기억이 끊어지고 나이든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은 27살 그 때 그 시절로 향하니, ... 여러모로 얼굴 들기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근사한 와인 만큼 인생의 위안도 ..

누런 먼지 같은 중년

어떤 기억은 신선한 사과에 묻은 누런 빛깔 먼지 같았다. 그래서 그 사과가 누런 흙 알갱이로 가득했던 맑은 하늘 아래의, 어느 과수원에서 익숙한 손길의, 적당히 성의 없이 포장되어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스테인리스 특유의 무심한 빛깔을 뽐내는 주방 앞의 아내 손길에 그 먼지는 씻겨져 흘러 내려갔다. 그렇게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다. 문득 내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15세기 중세 서유럽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 편으론 감사하고 한 편으론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만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어떤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시간의 틈에 끼어 오래되어 지쳐 잠들 뿐이다.그 잠든 모습을 스스로는 돌이켜보지 못하는 ..

세상은 엉망, 그러나 술이 있으니! 오늘은 홍대 티케로~

Tout irait mal, mais il y a le theatre! 세상은 엉망, 그러나 연극이 있으니! - 장 지로두 하지만 나라면, Tout irait mal, mais il y a le vin! 세상은 엉망, 그러나 술이 있으니! 올해 최초이자 마지막 송년 모임을 홍대에서 할 예정이다. 이런저런 모임은 놀랍고도 행복한 개인 사정으로 인해 취소하고 ~. 이런 음식과 함께... 저녁 7시부터 회사 부서 직원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옆자리에서 인사라도 ~.~ 이 글을 보게 될 제 친구분들께도 안부를~!! 장소는 홍대 티케(구 시루) http://map.naver.com/local/siteview.nhn?code=19867445 참조. 우리들의 친구 키에롭스키Kieslowski는 ..

중독

요즘 부쩍, 자주, 곧잘, 심심치 않게, 흔하게, 우울해지곤 한다. 집 청소를 하지 못한지, 2주일 째. 냄비에 담긴 음식물은 미동도 없이 2주일 째 그대로 방치되었고, 금붕어들이 노는 어항의 물도 2주일 째, 그대로다. 일요일마다 배달되던 신문은 요금 미납으로 끊겼고 그 누구의 편지도 오지 않는 우편함에는 딱딱한 표정을 가진 고지서들만 쌓여가고 있다. 몇 주 전 사놓은 미국산 피노누아 와인은 어두운 찬장에서, 어떤 기분으로 무너져가고 있을 지. 다시 젊은 마음을 가지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오래된 친구들 얼굴 깊은 곳에서 나이를 느낄 때의, 그 참담함이란. 참 이뻤던 친구가 무표정한 시선으로, 이 세상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할 때면,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까마득한 후배들과 아직도 종종 말이 통하지 ..

blogging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은 지 벌써 2주가 지난 듯 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여전히 쓸쓸하기만 한 술과 가까이 지내고 육체를 돌보지 않으며 넓은 방안의 먼지들과 둔탁해지는 영혼을 보며 안타까워만 할 뿐이다. 가끔 만나게 되는 묘령의 아가씨에게 던지는 내 '가을의 잔잔한 물결'(秋波)은 번번히 우아하지 못한 몸짓을 보여주며 시간의 연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두운 미래 만큼이나 어두운 내 가슴의 그림자를 내가 어쩌지 못하는 까닭에, 어느 화요일 비 소리는 종종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준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본 로만 오팔카의 그림을 보고 너무 좋았다. 그러나 로만 오팔카보다, 이우환보다 귄터 워커의 작품이 나에게 압도적이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그의 작품들은 둔탁한 운동의 두께 ..

절망의 서울을 넘어, 술의 나라로

절망의 서울을 넘어, 술의 나라로 가서 "불끈" 희망의 불씨를 찾아 나오자.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인생이란 가끔 말도 되지 않는 불가능에 도전할 때도 있다. 날이 추울 땐, 추운 것에만 신경을 썼는데, 요 며칠 따뜻해지니 여간 허한 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다.허할 땐 술이 최고이지만, 몸의 상태가 예전만큼 되지 못해요샌 포도주 일색이다. 하지만 포도주 경험이 늘어날수록 입맛이 까다로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ㅡ_ㅡ;;;돈을 거의 벌지 못하는 주제에 이래저래 고급 취향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나의 미래를 참담하게 만든다. 작년말부터 마신 술들이다. 이제 술을 마실 때마다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해둘 생각이다.술도 까다롭게 골라, 좋게 마시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터인데그간 아무렇게나 마신 듯..

새 근원수필, 김용준

새 근원수필 (보급판) - 김용준 지음/열화당 새 근원수필(近園隨筆) (근원 김용준 전집 1권), 열화당 며칠이고 조용히 앉아 길게 읽을 책을 띄엄띄엄 산만하게 읽은 탓일까,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늘 읽은 술 이야기 밖에 없다. “예술가의 특성이란 대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世事)에 등한한 것쯤인데, 이러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에 등한한 기질이 없고서는 흔히 그 작품이 또한 자유롭고 대담하게 방일(放逸)한 기개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다.” “술에 의하여 예술가의 감정이 정화되고, 창작심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에 있어 한낱 지대(至大)의 기쁨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199쪽) 내가 기억나는 문장이 이렇다 보니, 인상적이었던 단어 또한 매화음(梅花飮)이었다. 뜻은 매화가 핌을 기뻐하여 베푸는..